말씀으로 묵상하기

창세기 14장 묵상

skyroad 2020. 8. 24. 05:22

 

그러나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께 맹세하건대, 나는 왕의 것을 하나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왕의 것은 실오라기 하나, 신발 끈 하나도 갖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왕이 "내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마십시오. 다만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함께 갔던 사람들, 곧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몫은 챙겨 주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몫을 받아 마땅합니다."

(22-24)

 

아브람은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처럼 수고하지 않았는가. 

그는 그 사람들을 설득하여 전쟁에 참여하게 하고, 밤낮없이 쫓아가 전쟁을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수고하였다면 그 또한 수고하였고, 그것도 더한 수고를 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에 자신의 것을 얹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되찾은 재물의 십분의 일을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전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자신의 이기심을 빼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배를 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광훈 목사와 같은 이들은 결국 자기 배를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차용하며 아브람이 살렘 왕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행위가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종용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합치하는 결과를 수반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부흥사들이 주장하는 하나님께 바침과 교회가 배부름은 동일시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점점 그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삶이 더욱 팍팍해질 것이다.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을 드러내는 비이기적인 영웅적 행위기 여전히 필요하다. 

되돌이켜보면 이러한 비이기적인 행동에 의존하여 은혜로 살아왔던 것 같다.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고 내놓았기에 은혜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은혜에 의해서 또다른 은혜가 나타나곤 하였다. 

 

선교단체에 있던 시절, 누군가가 힘들어지면 몰래 돈봉투를 전하곤 하는 이들이 있었다. 

다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누군가를 돌아봄은 은밀하고도 지속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돌아보아도 예전같지 않은 것 같다. 

지나치게 생활인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몫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이 내게는 어떻게 적용될지를 고민해 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