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이가 이 땅에서 사십년 정도 살아가다가 하늘나라로 옮겨갔다.
어제 발인을 하고 화장을 했으니, 이 땅에 재경이의 육신은 사라지고 없겠다.
어제 오늘 뒤척이며 재경이 생각을 했다.
재경이와 나눈 카톡도 뒤져보고, 페북도 들어가 보았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육신이 사라지듯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재경이가 그렇게 점점 사라져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재경이를 기억해야할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재경이는 찬양팀 활동을 했다.
찬양하는 것을 사랑했던 것은 찬양을 하는 재경이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찬양팀의 후배들을 잘 챙겼다.
뺀질대던 후배 형제들을 챙기며 밥을 사주었고, 활동 이후에도 그 동생들이 잊지 않고 찾던 누나가 되었다.
위의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겠다.
예배 후 셋팅을 푸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마이크 선을 감는 재경이를 누군가가 찍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재경이를 잘 표현해주는 상징적인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마이크선을 감는 모습에서도 진지함이 느껴진다.
원래는 밝은 노랑색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다.
뒤의 꽃의 색도 화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색감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흑백으로 바꾸었다.
기억과 흑백은 묘하게 어울린다.
어느날 재경이가 나를 찾아와 자신이 아프다고 했다.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한 모습이 아니라 최대한 씩씩하게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재경이가 전해준 뇌종양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 소식과 함께 재경이는 자신이 하던 많은 일을 그만 두어야 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재경이는 자신이 사랑하던 아이들을 돌보던 일도, 찬양을 하던 일도, 자전거를 타는 일도 그만 두어야 했다.
길고 지루한 병마와의 싸움.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을 싸웠다.
너무도 열심히 싸웠고 그것에 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저정도의 열심이면 곧 회복될 것이라 믿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공동체를 시작하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재경이도 일년 남짓 이곳에서 삶을 살아갔다.
지나고 보면 무리였던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미처 가늠하지 못한 재경이의 삶은 분명 환자의 삶, 관리받아야 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함께 하는 공동체의 삶에서 그것이 존중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함께 하던 이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함께 웃고 즐기고 잊지 못할 시간들도 겪었다.
결국 날이 추워지면서 재경이는 자신의 삶을 관리할 수 있는 여건의 장소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이후의 삶에서 재경이는 천천히 하강했다.
신체적인 능력도 점점 하강했고, 몇번의 재발로 인해서 재활을 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마지막 수술을 받을 때에는 수술 이후에야 수술 소식을 들었다.
그 수술 이후에 재경이는 재활을 받기 힘들 정도로 처져 있었다고 한다.
함께 살아갈 때는 미안할 때가 많았다.
더 잘 챙겨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재경이에게 그 시간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살아간다고 하는 것에 걸맞는 삶이었고, 힘들고 부대끼는 삶이었지만, 다른 이들과 존재로 부대끼는 삶이었다.
후에 재경이가 그때를 생각하며 추억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야 미안함을 조금 덜 수 있었다.
하강해가던 재경이는 몇번의 쇼크를 겪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쇼크로 인해 몇번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때 재경이는 이러다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쇼크를 안고 살아가는 심경이 차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재경이가 하늘나라로 가기 한 주 전까지 카톡을 주고 받았다.
그녀는 내게 전화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내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전화오지 않는 재경이에게 몇번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재경이는 하늘나라로 가기 전 마지막 주에는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예배였다.
그리고 그녀가 예견한대로 다시 쇼크가 왔고,
그녀가 이야기한대로 그 쇼크는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쇼크였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나기 보다는 조용히 힘을 빼고 사랑하는 하나님께로 갔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매우 평온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내 책상 아래에는 재경이가 지난 생일에 선물해준 지압슬리퍼가 있다.
난 발지압을 무척 어려워한다.
지압을 위해 맨발로 어딜 다녀본 적도 없다.
그런 나에게 건강슬리퍼라고 지압슬리퍼를 그녀는 선물해 주었다.
여러번 시도해 보았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여러번 신어보았으나 끝내 실패했다.
나는 그 슬리퍼를 신으면서 마치 재경이의 삶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걸음을 떼기도 어려운 그 걸음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갔던 길이었다.
그녀의 한걸음 한걸음은 굳어가는 몸을 이겨내고 이겨내서 얻어낸 것이었다.
온종이 고생하여 얻어낸 걸음걸음을 칭찬하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곤 했다.
그녀에게는 삶이 그토록 힘든 것이었다.
재경이는 가고 우리의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 삶이 마쳐가면 우리도 점점 하강하다가 사그러지고 잊혀질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무엇을 후회할까.
일을 더 많이 하지 못해서 후회할까.
더 많은 업적을 이루지 못해서 후회할까.
여러 죽음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사랑이 남는다는 것이다.
김영봉 목사님의 책 제목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는 이러한 목사님의 묵상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재경이에게 잠시나마 부대끼는 삶을 준 것에 감사하고, 그 가운데 사랑의 분투를 하게 한 것이 감사하다.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되면 그때 이야기를 다시 해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싸움을 멈추지 말아야겠다.
우리에게 여전히 삶의 기회가 있음을 기억하며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자.
천국에서 만나면 반가운 이들 리스트에 재경이 이름을 올려 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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