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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삶 그루터기

그루터기 공동체 예배 이야기



그루터기 공동체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지도 9개월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우리가 살던 아파트 거실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몇 사람이 함께 했다.

아무런 부담없이 예배에 집중해 보자고 했다. 무언가를 많이 하기보다는 많은 것을 덜어내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예배와 함께 그루터기 하우스는 만들어져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안에서 드리는 예배도 조금씩 모양이 만들어져 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재적인원 25명의 예배공동체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탁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 

원탁이 의미하는 바를 오랫동안 우리의 내면 깊숙이 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원탁을 유지하려고 한다. 


원탁에서는 누가 개입을 해도 어색하지 않다. 

찬양을 하는 중에도 말씀을 전하는 중에도 원탁에 있는 누군가는 이야기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언권을 제한당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공동체의 예배는 대화가 오고간다. 


찬양은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쉬운 코드를 벗어난 찬양을 하면 다같이 틀리기 일쑤다. 

어려운 코드가 나오면 얼머무리기 주법으로 넘어가곤 한다. 

누군가가 심하게 틀리면 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한자락 흘러나오는 진심이 반갑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찬양이 처음에는 어색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우리가 얼마나 반주에 묻혀서 진실하지 않은 소리들을 내었는지를 자각했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로 찬양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씩 익혀가는 것 같다. 

그냥... 내가 그렇다는 거다. 


찬양을 하다가 기도제목을 듣는다. 

처음에는 다 들었는데 예배인원이 늘어나면서 불가능해져 버렸다. 

대신 인도자가 듣고 싶은 사람의 기도제목을 듣는다. 

일주일간 그들의 삶에 대해서 나름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감도 있기에 들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략은 듣는다. 

오늘은 6주간 군훈련을 마치고 온 형제의 가슴절절한 훈련이야기를 듣고, 삶의 막막함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는 자매의 이야기, 새로운 인생의 도전을 하는 이의 이야기, 그리고 독감걸린 아이와 부대꼈던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가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귀기울여준다. 

그것이 가지는 치유적 의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말하는 이의 정서적 회복, 그리고 더나아가 진실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 내 안에서 풀어지는 것을 기쁨은 진실한 고백들 가운데서만 나타난다. 



찬양하고 나눔을 하다보면 1시간이 지난다. 

브레이크를 갖는다. 

누군가가 가지고온 간식을 나누기도 하고, 해외에 다녀온 자매의 정성어린 선물을 받아들기도 한다. 

잠시 여기저기에서 환담을 나눈다. 

10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모인다.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눈다. 

기껏 30분이다. 

2시간이 넘는 예배시간을 생각하면 길지는 않은 시간이다. 

사실 잘 준비된 설교도 아니다. 

우리 아내가 가장 잘 알지만 정말 허덕이면서 설교를 쓴다. 

세 아이와 함께 부대끼는 삶에서 질이 높은 설교를 쓰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난 참고자료를 들고 아이들을 피해다니며 설교를 쓴다. 

아이들을 다 재우고 난 이후의 밤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 

시간을 쪼개서 책을 읽고 설교준비를 하고, 그 쪼갠 시간에 치인트와 시그널을 돌려가며 본다. 

일주일 내내 설교연구를 한 이들의 설교와 비교할 수 없을거다. 


그래도 참 좋은 게 있다. 

설교를 할 때 할 말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전에 지역교회에 있을 때에는 그렇게 못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고 그 말을 했는데 나 스스로도 공허하다. 

이야기하는 성경적 맥락이 설교가 행해지는 공동체와 연결되지 않고, 그때는 그랬다더라 혹은 우리의 현실은 좀 다르지만 잘해봐라로 마치곤 했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자괴감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설교가 쌓일수록 부채가 쌓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좀 낫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쌓여간다.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다. 

설교자로서 세번째로 하는 강해다. 

그런데 다르다. 

내가 그동안 고민해온 복음에 대해서 공동체에 대해서 가감없이 이야기할 수 있고, 적용하자고 권할 수 있다.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장이 있다. 


물론 이것도 앞에서 인도하는 자의 김칫국 마시기일수도 있다. 

여전히 공동체 예배를 드리는 이들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공동체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나는 작지만 큰 차이를 느끼는데 그것이 공감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여전히 내게 더한 것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내가 더 잘 설명하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하는 탓일게다. 

그래도... 난 좋다. 이전보다 훨씬. 


오늘은 로마서 14장을 이야기했다. 

로마교회가 당면한 먹고 마시는 문제, 절기의 문제. 

참 안 와닿는 이 문제가 공동체를 걸려넘어지게 한 작지만 큰 문제임을 본다.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로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고 분열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판단보다 앞선 사랑을 원하고 계셨다.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는 집을 세우는 수고, 그리고 화평의 중심을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강한 자들의 실천이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공동체를 향한 그러한 수고로 귀결된다고 이야기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정확한 영역이 보이기 시작한다. 

난 이러한 것이 말씀에 근접한 삶의 정황을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보고 싶다. 


말씀을 나누면 항상 설교피드백을 한다. 

이때는 모든 이들이 한마디라도 하게 한다. 

정말 한두마디로 그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작심하고서 자신과 말씀이 부딪힌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시간이 참 기대가 된다. 

말씀에 부딪혀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들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감사하다. 

어떤 이는 직장에서의 학교에서의 부딪힘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돌아보며 직면하여 내뱉는 가슴절절한 고백도 있다. 

어떤 고딩은 예배에 참석하고서 자신의 인생에서 졸지않고 1/3을 들을 유일한 설교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듣는 설교는 얼마나 하릴없이 흘러갔는지 모른다. 

목회자로서 수많은 설교들을 듣고 살았지만, 그 설교들은 말 그대로 흘러가는 것들이 많았다. 

그 설교 가운데 내 삶과 연결점을 만들었던 설교가 과연 몇편이나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준높은 설교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말씀 앞에서의 우리의 정직이 더 문제였을 수 있다.

그리고 말씀대로의 삶을 살아낼 수 없는 장의 문제, 지원의 문제가 더 큰 것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설교는 30분이되, 피드백은 1시간을 훌쩍 넘어가곤 한다. 

농담처럼 우리 지체들은 설교가 더 짧아지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말씀의 진의가 전달되는 만큼만 이야기하고 멈추려고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그들의 몫이다. 


헌금시간이 된다. 

우리 공동체에는 1번 헌금위원과 2번 헌금위원이 있다. 

별건 아니다. 

헌금함을 내게 전달만 하면 된다. 

처음에는 1번 헌금위원인 건우와 2번 헌금위원인 은우가 달리기 경주를 하곤 했다. 

먼저 헌금함을 나꿔채서 내게 가져오면 되는 거다. 

1번 헌금위원이 신체적 우월함을 과시하며 자꾸 승리하곤 했다. 

안되겠다 싶어서 1번 헌금위원과 2번 헌금위원이 번갈아 하도록 했다. 

지난 주에는 2번 헌금위원이 예배 중에 장난치다가 의자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1번 헌금위원과 함께 잠시 자리를 뜨는 바람에 헌금위원 결원이 생겼다. 

그래서 오늘 헌금위원을 누가 해야하는지에 대한 유권해석이 필요했고, 지난 주에 하지 못했던 1번 헌금위원이 하도록 했다. 


모든 헌금은 회계에게 바로 전달된다. 

나는 회계에게 돈을 쓰자고 조르는 입장이다. 

이번 주 리더모임에서는 처음으로 운영위원회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했다. 

재정은 최대한 투명하게, 그리고 목회자의 생계가 우선순위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실천이 우선이 되는 실행을 하기로 했다. 


헌금이 내게 전달되면 잠시 헌금기도를 한 후에 주기도문을 하고 예배를 마친다. 

축도를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원탁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설교하는 성도인 내가 갑자기 도드라지는 것 같다. 

주기도문이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함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외우며 다시 살아야 할 삶의 예배를 생각하며 예배를 마친다.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해서 오후 4시경에 마쳤다. 

(오전에 모이다가, 청년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오후로 바꾸었다.)

긴 예배 시간이지만 누구도 길다고 투정하지 않는다. 

함께 예배공간을 정리하고 난 이후에 바쁜 사람은 가고 보드게임 판이 벌어진다. 

우리 예배장소 창고를 열면 보드게임이 한가득이다. 



요즘은 시타델과 뱅이 단연 인기다. 

스플랜더와 아임더보스 카탄에 이어 인기를 얻게 된 게임들이다. 

유행을 타는 것 같다. 

몇개월에 한번씩 새로운 보드게임을 연구하며 함께 해보는 것이 공동체의 낙이다. 


마음이 맞으면 함께 영화를 보기도 한다. 

모임공간의 거대 TV로 최근에는 어린왕자를 함께 보았다. 


놀다가 저녁시간이 되면 함께 밥을 해 먹거나 나가서 밥을 먹는다. 

오늘은 담양의 맛있는 중화요리집을 찾아갔다. 

함께 흥분하며 쟁반짜장과 쟁반짬뽕을 먹었다. 


간단하게 공동체의 예배를 나누었다. 

공동체 예배가 왜 특별하냐고 물으면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왜 그렇게까지 유별나게 교회를 뛰쳐나가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를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는 대답 외에는 할 게 없다는 거다. 

그러나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적어도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 시대의 교회의 심각성을 표현할 수는 없다. 

적어도 무언가를 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이 내게 계속적으로 의미를 던져주기에 난 해볼만 한 것 같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