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트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영화이다.
프랑스 기업 까르푸가 사업을 정리하고 홈에버로 기업을 매각하는 상황에서 월드컵경기장점에서 벌어진 일로 기억한다.
기독교 기업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갔던 이랜드는 공격적 M&A 를 하는 기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사업의 전환을 일종으로 까르푸 인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직원들 고용승계를 하지 않고, 인원을 아웃소싱하려고 하게 된다.
내 기억하기로는 영화의 배경은 그렇다.
영화는 성실하게 살려고 했던 천선희라는 여인의 눈을 통해서 진행된다.
3개월 후면 정직원으로 전환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믿으며, 회사의 이익이 곧 나의 이익이라는 생각으로 계약직 직원의 삶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계약해제통보는 그녀의 삶에 균열을 가져오게 된다.
처음에는 노조의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던 그녀는 점차 전면에 서게 되는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되고, 그대로 당하고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을 얻고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관객은 천선희의 시각을 따라가며 조금씩 함께 눈을 뜨기 시작해 갈 것이다.
그녀의 아들 도경수가 편의점에서 당한 일을 대처하는 그녀의 반응은 이러한 그녀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도경수도 그녀와 함께 변화되어 간다. (그리고 쫌 멋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아주 새로울 것은 없다.
예상하는 범위 내에서 영화는 진행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미덕이 있다면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영화라는 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되었다.
안전한 위치에 있는 정규직들의 냉소적인 반응과 자기보존적인 행동들.
비정규직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현실에 매이는 이기적이기를 요구받던 사람들.
그 가운데서 가치를 지켜내고 정의를 지켜내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지독하게 어려운 삶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나라면 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는 기독교 기업인 이랜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역자인 나는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기독교 기업을 표방했던 이랜드. 그리고 선교를 열심히 하고 세금을 내는 것을 소명으로 알던 그 기업.
지금도 직원들 경건회가 존재하고, 사목이 있고, 찬양대회가 있는 그 기업. 그 기업은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지난해에 있었던 NC WAVE 찬양대회가 갑자기 생각났다.
우리 교회 장소를 찬양대회 장소로 쓰고 싶다고 했다.
사목이 나와 아는 사이인지라, 내가 주선해주는 것으로 하고 찬양대회를 했다.
나는 부끄럽게도 심사위원으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지점장도 그리고 대다수의 직원과 비정규직원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교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직원들도 많았다.
심사하기가 불편할 정도로 입으로는 찬양을 하지만 그것은 찬양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듣기에는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충성경쟁처럼 들렸다.
심사하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그래도 심사평을 하고 점수를 주었다.
뷔페 식사권을 받아 온가족에게 한턱 쏘았다.
그래도 씁쓸했던 기억으로 오랫동안 남았던 것 같다.
기독교 기업인 이랜드는 내가 보기에는 정확히 2세대 복음주의자들의 시각 안에 갇혀 있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성실함에는 접근했지만 복음전도와 기독교문화 바깥으로는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이랜드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충실하면서 그 가운데서 기독교적 도덕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지독하게 근대적 시각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을 가지지 못한 자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자산을 가진 자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들도 성실성으로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은 반역이며, 게으른 자들의 소치이다.
그래서 그들을 인간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랜드와 박성수 사장의 시각은 이러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김강우는 정규직이다.
평판도 좋은 대리이다.
그런데 그가 노조를 조직하고 노조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는 비정규직들과 끝까지 가려고 하다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인생을 망쳐버린 케이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처럼 두번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노조나 내부고발자가 감당해야 할 어려움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현실에서 불의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는 산상수훈의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이다
우리의 시대는 대가를 요구한다.
누군가는 일어나야 하고,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한다.
누군가는 어려운 이들 편에 서야 하고, 오해를 견디면서도 인내해야 한다.
나는 과연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저들처럼 카트 뒤에 설 수 있는 사람인가.
영화의 마지막 상징적인 장면처럼 생의 힘겨운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가.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나아가는 카트처럼 이 어려운 시대의 문제를 조금씩 나아지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영화는 묵직하게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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