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으로 묵상하기

창세기 43장 묵상

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재촉했다. "제가 책임질테니 그 아이를 보내 주십시오. 우리가 곧 떠나야겠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우리 가족 모두가 굶어 죽게 됩니다. 우리도 아버지도 우리 자녀도 다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아이의 안전을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그 아이의 생명과 제 생명을 맞바꾸겠습니다. 자 그 아이를 무사히 데려오지 않으면, 제가 죄인이 되어 모든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꾸물거리지 않고 갔더라면, 벌써 두 번은 다녀왔을 것입니다." (8-10)

 

식량이 떨어져 간다. 

소망이 있다면 이집트에 있는 식량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베냐민의 목숨까지도 담보잡고 싶지 않다. 

라헬이 죽고 요셉도 죽었다고 생각했다. 

라헬의 유일한 핏줄은 베냐민 밖에 없다. 

사랑했던 여인의 유일한 핏줄이다. 

그러나 다 같이 살기 위해서는 베냐민도 이집트에 보내야 했다. 

 

이때 유다가 아버지를 재촉한다. 

자신의 생명을 베냐민의 생명과 맞바꾸겠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마지못해 허락한다. 

맞아들 르우벤이 요청했을 때는 거부했었다.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까지도 담보잡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러나 유다의 청은 받아들이고 있다. 

 

왜 르우벤의 청은 거절하고 유다의 청은 받아들였을까. 

물론 상황의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르우벤과 유다에 대한 신뢰의 차이가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한다. 

 

유다는 살리는 존재이다. 

동생 요셉이 죽을 수 있는 위기에서 그나마 유다 때문에 종으로 팔리게 된다. 

그리고 온 가족이 굶어죽을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잡아 가족을 살리려고 한다. 

이스라엘은 유다의 이러한 본질을 보았고 그래서 유다를 믿고 베냐민을 허락하게 된다. 

 

평화를 가져오는 자는 그 존재에 평화를 담고 있어야 한다. 

르우벤은 평화를 담지못하는 것은 그가 이전에 보인 행동 때문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비겁해 보인다. 

그는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고 비겁하게 변명하는 자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습한 욕망을 드러내어, 아버지의 첩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그 형제들도 그것을 알고 그에 대한 신뢰를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잠자리를 한 형이라니... 함께 있기 거북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존재가 평화를 가져오는 자인가. 

내가 개입하는 것을 통해서 상황의 변화, 분위기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평화의 존재라면 우리가 가는 곳마다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평화를 심어야 한다. 

그래야 평화를 거두는 자가 된다. 

 

기도

이 세상의 평화의 도구가 되길

 

감사

오랜만에 재갑을 만나 식사하고 차마실 수 있어서 감사. 

'말씀으로 묵상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20:41-21:4  (0) 2020.11.02
창세기 44장 묵상  (0) 2020.10.28
창세기 42장 묵상  (0) 2020.10.26
창세기 41장 묵상  (0) 2020.10.21
창세기 40장 묵상  (0) 20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