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상황은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러한 것이다.
이는 준미래에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던 그러한 일이고, 우리는 그러한 준미래를 지금 현재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조금씩 그 사태 이후의 우리의 믿음과 영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거대한 교회 중심, 대중집회 중심의 기독교가 사회적 관심을 받고 있고, 평가를 적나라하게 받고 있다.
우리끼리 유지하던 것들이 세상에 노출이 되고,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 있다.
이러할 때에 우리는 우리만의 네비게이션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교회 안팎으로 변화는 진행되고 있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의 태도가 무엇인지 우리는 질문받고 있다.
우리는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신천지에 6개월만 몸담고 있으면 빼내오기 힘들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러한 힘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일단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만 만나면 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점점 우리는 그 힘을 상실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참된 영성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봄이 필요하다.
즉 시대를 관통해가는 우리의 전통이 가진 참된 영성이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이다.
리처드 로어는 "완벽함이나 통제, 또는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추구하는 것은 참된 영성이 아니다. 참된 영성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완전함을 추구할 것인가 하나됨을 추구할 것인지를 묻는다.
일반적인 종교는 개인의 완전함을 추구하여 질서, 단결, 다음 세상으로의 도피 등을 추구하지만, 신비가들은 전적으로 선물일 뿐인 하나님과 하나됨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즐긴다.
리처드 로어는 혼란스러운 미래에서 영성을 유지하는 길은 바로 하나됨을 추구하는 길에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무질서와 불완전함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곤 하셨다.
완벽함을 주장하던 이들에게서 탈출하여 항상 무질서와 불완전함 속으로 향하셨던 분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주장하며 그 길로 제자들을 이끌었다.
사실상 예수는 대부분의 시대와 문화에서 낯설고 거북한 존재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복음을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의 핵심메시지와 구체적 이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예수가 전해주었던 그 힘을 망각해 가고 있다.
우리가 처음부터 답을 가지고 있는 양 구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러한 자세는 완전함을 추구하는 자세이며 딱딱함에 우리를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가야 한다.
제임스 앨리슨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성숙한 초월은 "하나님 안으로 떨어져 하나님을 겪는 것"이다.
이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비워내어야 가능하다.
이러한 초월을 통해서 우리가 한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함께, 뭔가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어렴풋이 알 따름이다.
우리는 두려운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우리의 통제를 상실해가며 누군가의 손아귀에 잡히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를 비추는 단 하나의 거울 앞에 서게 된다.
이를 리처드 로어는 '벌거벗은 지금'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대는 그대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대를 발견한다."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우리를 비추는 왜곡된 거울로 가득하다.
깨어지기 쉽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울을 비추어주며 그러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라고 외친다.
피상적 이미지의 광고에 자신을 내어주며 조작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좋고 즐겁고 본질적인 것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현존과 그에 따라오는 믿음, 소망,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을 달라고 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 청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려가는 것이다.
성령은 여러 교리 가운데 하나의 것이 아니다
사실상 성령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고 우리자신을 직면했을 때, 그분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가 성령을 잃어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는 것이 전부다(엡 4:30).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샘물을 길어올리는 것 뿐이다.
선물은 분명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갈망하고 알아차리는 일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둠을 통과하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기도는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다.
리처드 로어는 기도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 내면의 여행 혹은 수련"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연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를 '관상'이라고 한다.
관상은 하나님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보는 훈련이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우리의 것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간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한다.
더욱 정확하게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하여 기도하신다.
우리의 영성생활은 우리 안에서 일을 계획하고 시작하신 하나님께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무너지는 일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왔던 일이다.
넓은 눈으로 이 사태를 보면 무너져가는 교회성장학 중심의 교회가 보인다.
지금 무너지는 것은 교회성장학 중심의 교회일 뿐이며, 왜곡된 영성을 가진 교회일 뿐이다.
이것이 무너지는 것을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우리는 더 깊은 우물에서 우리의 영성을 길어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코로나19의 사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와 격리시키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영향받고 있었던 불건전한 영성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진실을 직면하게 하기 위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흔드셨다.
예배에 참석하고 주일성수를 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찾고 완전함을 이루려고 했던 패턴이 흔들리고 있다.
이러할 때에 완전함을 이루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들지 말고 우리 안의 성령의 인도를 받아가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앞으로 코로나19와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그저 일회성 상황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가야 한다.
완전함을 좇지 말고, 신비가가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계속 깨달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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