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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풀어놓기

문명의 전환기를 살아가는 기독교

종교가 세상을 설명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던 때도 있었다. 

해석할 수 없는 자연의 현상과 질병, 불행을 신의 언어로 해석해 내고 그러한 해석을 하는 이들이 권위를 가졌다. 

그러나 과학과 이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설명가능한 영역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그에 있어서 예외를 줄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권력으로서의 종교는 그 위치를 잃고 자기의 자리를 잡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종교가 지배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때를 좋았던 때로 이해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때에 종교지도자의 위치는 다른 이들이 접근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고, 그러한 권위에 의존해서 지배적인 행위를 하곤 했다. 

역사 속에 남아있는 무수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그리고 십자군 전쟁 등의 모습은 통제되지 않은 종교권력이 어떠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이다. 

그리고 묘하게도 신천지는 종교의 권력이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좋다고 여기는 이들은 신천지를 보며 향수를 느낄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신천지는 우리가 어떠한 종교적 작태를 행했는지 보여주는 낯뜨거운 예로 보인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으며 주일예배가 된서리를 맞고 있다. 

한달 가까이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자,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 

나도 지난주를 보내면서는 좀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교회가 모임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이 사회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지자체가 모임자제를 요청하고, 통장들이 돌아다니며 교회모임을 하지 않도록 권하고 있다. 

세상에 위기가 닥친 이러한 때에 구원기관 혹은 영적지도기관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세상은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가 사고를 치지 않도록 걱정하는 것이 세상의 주된 시각이다. 

 

과학적 사고 혹은 이성적 사고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관습적으로 해오던 일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배를 드리면 혹은 기도를 하면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교회가 하는 농담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보면서, 그동안 그러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교회를 형성해왔던 이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는 이에 대한 반동적인 시각과 행동도 존재한다. 

어떻게든 예배를 사수해야 하고, 지자체의 모임자제요청 혹은 금지요청에 대해서 반박하고자 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우리는 문명의 전환기, 혹은 과도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 문명의 전환기에 교회도 시험을 받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시대의 전환기에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껏 교회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해왔다. 

그런데 그 자만이 지금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우리는 교조적이며 자만하게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온 교회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시기를 강요받고 있다. 

버나드 로너건은 과학적 사고가 우위를 점한 이래로 하나님이란 존재는 헛된 상상이 되어가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진리의 객관성을 부인하지 않되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진리의 객관성에 대해서 과장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특히 그것을 이해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객관성을 찾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성을 명확히 보고 치유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회심'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회심의 과정은 우리의 상처와 부족함과 자기중심을 분명히 보고 치유하여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도록 돕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만큼 진실을 보고 그 본 것을 회심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된다. 

회심이란 몇가지 종교적 신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람으로 바뀌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회개하라'고 했다. 

이는 헬라어 원어로 '메타노이아'인데 이는 '네 마음을 바꾸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만일 이 상태. 즉 마음을 바꾸는 것에 계속 천착하는 기독교를 만들어 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독교는 회개했다는 이들에게 다른 마음이 아닌 다른 행위, 다른 신조, 다른 체제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굳게 한다. 

그것은 에고를 강화하고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는 의식을 강화시킨다. 

자기비판 없는 기독교,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기독교는 더이상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다. 

 

세상의 변화 속에서 우리가 여전히 마음의 변화에 붙들려 있고 하나님의 실재와 연결되는 기도가 핵심이 되는 기독교를 유지하면 어땠을까. 

기도란 하나님의 궁긍적 실재와 연결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가 우리 안에 계속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관점으로 계산하고 비교하여 아는 것을 넘어선 신비를 인정하게 된다. 

기도는 자기방어를 버리고 온갖 두려움과 적의를 놓아버리고 완전타자에게서 오는 안내를 기다라고 기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사사로이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일어나는 무엇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우리는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신조를 바탕으로 삼는 종교에서 수련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로 옮겨가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유럽에서 시작된 신학이라는 고도의 학문과 미국에서 나타난 비역사적 근본주의를 이제는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다. 

왼쪽 뇌에서만 일어나는 작용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절반의 실천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열고 깊은 깨달음으로 들어갈수록 이전의 모든 단계를 포함하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삶을 지향하며 포용을 지향하며 사랑을 지향하며 살아내는 실제적 기독교로 전환해 가야만 한다. 

 

나는 이러한 고민이 현재의 교회가 고민하고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성경이 예수가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유지해온 기독교의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을 잃게 만들었던 것들을 이제는 무너뜨리고 제거하는 일이 시작되고 있다. 

어쩌면 되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