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김상봉 교수님의 글과 강연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4.3사건이 발생한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제주 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건이 가지는 위치가 독특한 것은 어느 편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객관적 사실 인식에서부터 가치인식에 이르기까지 그 판단이 극단적으로 대립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전히 4.3사건은 적절한 이름을 가지지 못한 채 역사적으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4.3사건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서로를 향한 지독한 폭력성입니다. 이는 좌익 무장대와 군경 및 우익단체에서 공히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어느 진영의 편에서 미화를 하다보면 이러한 사실이 희석되곤 합니다. 그러나 그때 제주에서는 서로의 진영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양민을 경쟁적으로 학살하는 비겁한 대립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대립을 일으킨 근원에는 일제강점기에 경찰이었던 이들이 해방이 된 후에도 여전한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좌우의 대립을 넘어선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는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에 참석한 이들을 향해 발포하여 여섯 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으로 인해 폭발하고 제주도 내 총파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김상봉 교수님은 그러한 무장폭동은 이 땅에 흐르고 있는 본원적 항쟁의 역사에 잇닿아 있지 않다고 해석합니다.
즉 3.1운동의 평화적 시위나 전봉준의 무장봉기와 같은 의로운 봉기로서 그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김상봉 교수에 의하면 기존의 공권력에 폭력적인 수단으로 저항하는 무장항쟁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국가의 악이 용납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야 합니다. 둘째 이상적인 나라를 항쟁의 목표로서 지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항쟁은 무장항쟁의 경우에도 폭력사용에 있어서 일정한 내적 절제와 규율을 스스로 지키게 됩니다. 5.18의 경우에는 이러한 의로운 봉기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의 경우 이러한 의로운 봉기의 역사에서 벗어나 있고, 여전히 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이는 의로운 봉기의 역사의 맥락이 아닌 서로를 향한 증오가 맞닿은 지점에 놓인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근현대 한국의 민중항쟁사를 관통하는 종교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를 김상봉 교수는 영성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보고 있습니다. 해월 최시형은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 또는 후천개벽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동학 농민군이 한 개 죽창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동학의 가르침으로 때로는 안중근의 신앙으로 때로는 한용운의 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때로는 함석헌의 뜻에 대한 믿음으로 변모해 왔습니다. 김상봉 교수는 이러한 믿음이 특정한 종교의 교리체계에 갇힌 믿음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민족은 종교성 혹은 영성에 의해서 움직여가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민중항쟁사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종교성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한때는 불교가 그리고 다음에는 성리학이 이러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성리학이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즈음에 실학자들 중 일부가 성리학을 대체할 사상으로 천주학에 주목했습니다. 학문연구로 시작한 천주학에 대한 접근은 결국 인격신에 대한 발견으로 이어지게 되고 천주교에 입문하게 되는 신자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점차 민중항쟁의 역사와 결별하게 되고 구한말 선교사들에 의해서 유입된 기독교가 조선 땅에 새로운 희망을 보게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민중항쟁을 이끌었던 주요한 사상은 단연 기독교였습니다. 심지어 동학마저도 천주실의를 동양의 관점에서 해석한 사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오고 있습니다. 최시형은 제2차 아편전쟁을 바라보며 서구의 제국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주체적 신앙을 만들어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제국적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 그 힘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내면적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3.1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적 믿음과 혁명적 실천의 공속은 공산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3.1운동 이후 기독교는 보수화되어가며 이러한 공속의 힘을 잃어갑니다. 반면 공산주의 사상은 혁명적 기치를 내걸며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혁명이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역사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적에 대한 증오밖에 없습니다. 내면의 증오가 강렬할수록 폭력은 더욱 더 잔인해지게 마련입니다. 공산주의는 이 땅에 유입될 때부터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기독교의 말살을 추구했고 결국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서 기독교세력은 축출됩니다.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의 기독교 세력들은 대부분 남하하여 남한에서 새로운 기독교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해방 후 10년 동안 남한 지역엣 새로 생긴 교회의 무려 90%가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 교회였습니다. 대표적인 교회로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가 있으며 이 교회를 중심으로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회가 조직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4.3사건은 이러한 대립이 제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나었던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때 조선을 생동감있게 했던 서북의 기독교세력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상처받은 채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고 그러한 기회가 오자 피의 응징을 가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4.3사건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두 세력의 서로를 향한 양민학살의 원형을 보여준 사건이며 이러한 응징적 사건은 한국전쟁에서 그리고 이 땅에 면면히 흘러내려오는 증오의 감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4.3사건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난 지금,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는 남북 정상이 만나서 평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영구적 평화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땅이 기독교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진정으로 평화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되는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70년 묵은 오랜 원한의 감정을 뛰어넘어 진정한 평화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답은 본래적 영성으로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조선을 꿈꾸게 하고 새로운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했던 본래적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이 땅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선배들이 보여준 영성이며, 온전한 평화를 이루고자 했던 이들의 영성입니다. 이러한 영성을 일구어가는 것은 평화가 구현되는 공동체 영성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와 상생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이것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적대의식으로는 이 시대를 관통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진정으로 평화를 일구어 갈 수 있는 힘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4.3운동이 일어난 지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기회 앞에서 진정한 평화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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