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풀어놓기

그루터기 재정에세이 - 십일조와 헌금을 극복하는 새로운 구조를 향하여

공동체의 재정 TFT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해야할 역할은 공동체에서 사용되는 재정을 어떻게 말씀에 근거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에 걸친 에세이를 통해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어떻게 재정을 사용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십일조에 대한 오해와 올바른 적용에 대한 생각을 나눕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초대교회 때는 십일조가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성전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한 일종의 조세입니다. 

바울의 서신 어디에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십일조로 접근하지 않고 연보라는 개념을 씁니다. 


말라기 3:10을 강조하여 십일조의 복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를 공동체 나눔의 기조로 삼는 것이 보다 신약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기 선교정책 중에 ‘네비우스 선교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사역하던 네비우스라는 선교사가 조선의 선교를 위해서 세운 원칙으로 흔히 ‘삼자운동’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자진전도, 자력운영, 자주치리가 그 기조입니다. 

자력운영을 위해서 목회자가 자립해야 하고, 자립하기 위해서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십일조는 이러한 운영방침 가운데서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운영방침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그당시 대표적인 성서주석가인 박윤선 박사는 구약성경의 십일조는 신약시대에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고 했고, 교리화하거나 제도화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경직 목사도 동의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출석교회와는 상관없이 십일조가 필요한 곳으로 보내져야 하다고 했다가 교단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현재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십일조라는 헌금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유독 그 맹위를 떨치고 있는 곳은 한국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하는 걸까요. 

십일조는 원래 고대근동지역에서 세금을 바치거나 고울을 바칠 때에 쓰이던 관습입니다. 

고대근동의 여러 기록에서 그러한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또한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부터 이러한 관습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구약율법에서 이야기하는 십일조는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이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토지분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아들로 맞아, 13지파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위지파는 성막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토지분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대신 각 지파에서 각 4성읍을 레위지파에서 주게 됩니다. 

레위지파는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그 성읍을 통해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십일조는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모아 레위인에게 주는 것. 그것이 십일조였습니다. 


십일조는 돈으로 낼 수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어려운 이웃들과의 나눔입니다. 

레위기 27장 31절에 의하면 누군가가 돈으로 십일조를 내려고 하면 10분의 3에 해당하는 것을 더 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도가 토지소산과 가축에 있다는 것을 강조해주는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굳이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원하셨을까요.

그것은 토지가 여호와의 것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땅이 안식하는 안식년에는 십일조도 쉬게 된다는 점입니다. 

토지분배가 골고루 이루어진 상황에서 십일조의 분량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이렇게 땅의 공의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함께 책임을 분담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사회는 땅에 대한 정의가 무너져 있습니다. 

땅의 대부분을 상류층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십일조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행위로도 볼 수 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십일조로 얻은 돈을 또 땅을 사서 부를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엄청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구합니다. 


십일조는 음식으로 나누어져야 했습니다. 

기업이 없는 이들과 나눠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주는 것은 마음이 전달이 안됩니다. 

음식을 주어야 마음이 전달됩니다. 

음식을 주어야 엉뚱한 도둑질이 제한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공의가 분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돕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평등한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를 불평등한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종의 조세제도입니다. 

그 조세제도는 연약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흘러가는 구조입니다. 

바벨탑과 같은 상부구조를 세우기위한 조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걸맞는 헌금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에 대해서 TFT에서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견이 있으시면 댓글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루터기 공동체 재정에세이 2 – 그럼 말라기 3장은 어떻게 하나?


말라기 3장 8-10절은 십일조 근거본문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일종의 ‘십일조 신앙’이 생겨납니다. 

하나님 앞의 온전한 십일조. 그리고 그로 인한 엄청난 축복. 

이것이 십일조 신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에세이는 그 신화를 깨기 위한 글입니다. 


사무엘은 이방나라들처럼 왕을 세우기를 원하는 백성에게 ‘너희의 곡식과 포도주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라’(삼상8:15)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십일조는 모세율법의 십일조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의 십일조, 즉 착취를 하기위한 십일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 왕을 거치면서 이러한 십일조가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모세 율법 이후, 특히 왕정시대에 십일조의 변질은 심각했습니다. 

우상으로 바치는 십일조로 변질되었고, 바벨론 시대를 거치면서 규정 자체가 사문화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말라기서는 그러한 현상의 극점에서 쓰여진 예언서입니다.


말라기가 쓰인 시기는 예루살렘 제2성전 재건시기인 BC515년경이며 느헤미야의 개혁시기와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 가운데서 입증된다’는 역설적인 주제입니다. 


이제 논란이 되는 말씀을 한번 읽어봅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8-10)


참으로 가슴이 뛰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갖 복의 근원이 여기에 있고, 카네기나 록펠러가 받았다는 복도 여기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따져가며 이 본문을 보면 이 본문해석에 숨겨진 음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ㅋ 요즘 음모론이 현실이 되는 시대 아닙니까?


말라기는 기본적으로 제사를 잘못 드리고 있는 제사장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습니다. 

말라기를 해석하는 학자들의 논쟁은 말라기 후반부 즉 2장 10절부터는 백성들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주장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제사장들을 부르다가 백성들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것이죠. 

그러나 면밀한 원어분석과 문맥을 통해 말라기는 근본적으로 제사장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 최근의 해석의 중론입니다. 


‘십일조와 헌물’

3:8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것은 지금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쳐지기 전에 너희가 도둑질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근거입니다. 

이미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행되는 헌물은 이미 성전 안에 들어와 있는 물건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하는 것은 백성들이 아닌 제사장들입니다. 

이 구절로 백성들의 죄책감을 유발하고자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번역의 과정에서 이 ‘헌물’이 삭제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십일조를 활용하고자 하는 이들의 지속적인 노력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번역의 과정에도 반영됩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에서 소유격 ‘너희는’은 ‘너희가’라는 주격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에서 ‘온전한’은 ‘모든’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흔히 너희가 내어야 할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 강조하는 시각은 마치 세법을 만들 듯이 어떻게 십일조를 내야 온전한 십일조가 되는지를 설명하곤 했습니다. 

공동체 가운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라고 제정된 십일조가 형식적인 규정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백성이 바친 십일조를 빼돌리지 말고 ‘모든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라”

말라기 3장의 이야기는 이러한 이야기가 됩니다.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에서 “쌓을 곳이 없도록”이라는 구절도 자의적 번역입니다. 

원문에는 “쌓을”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을 표기하기 위해서 작은 글씨로 적어놓습니다. 

히브리어 사전은 이 구절을 “복이 다할 때까지”로 해석합니다. 

“영원히”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사장들에 의한 십일조탈취사건을 역사상 실제로 등장합니다. 


느헤미야 13장 4-10절에는 제사장들의 십일조탈취사건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몽땅 빼돌리고 유력인사 도비야에게 양도한 사건입니다. 

레위인들은 살 수가 없어 모두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학자들은 바로 이때 말라기가 활동했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근심하고 분통해하며 도비야의 세간을 다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요청하고 새로운 곳간지기를 세웁니다. 


요세푸스 시대에도 이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요세푸스 시대에는 아예 대제사장들이 종들을 백성의 타작마당에 보내어 레위인에게 줄 십일조를 미리 강탈해 갔습니다. 

아예 십일조 강도짓이라고 할 수 있죠. 


한번 정리해보죠. 

말라기 3장의 상황은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탈취하는 정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백성들이 온전치 않은 헌물을 드렸을지라도 그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의 책임은 제사장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전환해야 할까요. 

주술적인 십일조에서 떠나야 합니다. 

십일조를 공적 인정된 교회에 내면 인정된 복을 주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일조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약한 자를 섬기며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6:38의 ‘우리의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는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십일조의 혁신은 이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재정 에세이 3 “예수 시대의 십일조와 예수의 대답”


이제 우리는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셨는지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점이 될 것입니다. 


예수 시대는 세금이 과중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민세와 종교세를 포함하여 수입의 절반 정도를 세금으로 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일반 백성 중에 하루에 한낄르 제대로 챙겨먹을 수 있으면 중산층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분위기였습니다. 


반면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은 엄청난 급료를 받았습니다. 

제사장들은 고기를 원없이 먹을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평균잡아 수확의 50분의 1이 제사장 차지가 되었고, ‘할라’라고 불리우는 모든 식재료의 일부가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세금도 있었습니다. 

세금이 너무 과중한지라 백성들은 세금납세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노숙자처럼 떼를 지어 유랑하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은 자들을 ‘암 하레츠’ 즉 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구한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의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외척과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심했던지라, 사람들은 일하면 즉시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민초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유랑하곤 했다고 합니다. 


구약을 보면 크게 세가지 방식의 십일조가 등장합니다. 

민수기 18:21의 레위인에게 돌리는 십일조

신명기 14:23의 식구들끼리 나누어 먹는 십일조

신명기 26:12의 3년마다 드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가 그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세가지 모두의 십일조를 주장했습니다. 

매 3년에는 세가지 십일조를 지키느라 매우 고생을 했겠죠. 


바리새인들은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내지 않은 십일조까지 감당하려고 했던 이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다음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누가복은 11:42)


이 말씀은 화를 선언한 것 중의 일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식재료의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행동의 과함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 본문을 십일조 근거본문으로 활용합니다.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의와 인과 신을 강조하는 이 본문은 저런 것들은 십일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런 것들은 여러 제사 행위를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게다가 이는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 즉 과거진행형에 해당합니다. 

‘십일조를 바칠 때 의와 인과 신을 버리지 말아야 했다’는 말입니다. 

중심은 의와 인과 신이되, 명령형이 아니고 과거를 돌아보며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지키는 십일조를 긍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여인들의 뜰’ 근처의 나팔 모양의 열 세 개의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여인을 주목하십니다.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 1/64에 해당하는 적은 액수입니다. 

그녀는 생활비 전부인 그 금액을 아마도 자선용 헌금함에 넣은 것 같습니다.

예수는 그 헌금이 큰 헌금이라고 하십니다. 

금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시하지 않으며, 자신을 헌신하며, 십일조의 정신에 걸맞게 나누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헌금을 언급하신 다음에 성전의 파멸을 예고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눅21:5-6). 

그토록 아름답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그 성전을 지탱하는 지도자들의 근원적인 죄악의 구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와 두 렙돈의 헌금의 방식. 우리는 두 렙돈의 헌금의 방식을 지향해야 합니다.


먼저 헌금으로 권위나 선물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십일조의 복도, 헌금을 많이 내는 이의 발언권이나 특권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헌금의 크기가 중요해져서는 안됩니다. 

헌금의 액수가 공동체에 알려지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십일조로 등급매기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고 정신입니다. 

구약에서 제정한 십일조의 정신이 구체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에서는 십일조라는 이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교회를 살찌우는 헌금을 지양해야 합니다. 

화려한 성전을 유지하고, 성직자의 호화스러움을 유지하는 헌금구조는 옳지 않습니다. 

사역자를 헌금으로 지원할 때에도 도시근로자의 임금에 준하여 원칙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건물관리비나 유지비가 지나치게 많이 드는 구조는 이웃을 돌아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힘써 헌금해야 합니다. 

그 헌금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지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체를 돌아보는 데에, 그리고 의미있는 곳에 우리의 물질이 흘러가도록 해야합니다. 

먼저 가치를 정하고, 마음을 모으고, 물질을 모아가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재정 에세이 4 “십일조의 역사적 변천”


이제 예수 시대 이후에 십일조가 어떠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이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아는 십일조는 역사적으로 일종의 패턴을 유지하며 강조되는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이후 기독교는 지속적 탄압 속에서도 세력이 확장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가 세상의 중심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교회의 변질도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십일조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재정적으로 쉽지 않은 때였지만 십일조를 헌금으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십일조가 아닌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강조하며, 오리게네스는 십일조는 헌금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어거스틴은 십일조를 의무로 여기긴 했지만 그보다는 자유로운 연보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AD 585년 마콘 교부회의에서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로 채택됩니다. 

그당시 십일조는 주로 가난한 자들을 돕고 포로를 풀어주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AD 800년경 샤를마뉴 대제에 와서 십일조가 정식 법령이 됩니다. 

샤를마뉴 대제는 십일조가 먼저 주교와 사제를 위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조직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합니다. 


그런데 점차 십일조 제도는 변질을 하게 되고, 심지어 지주가 십일조를 횡령하고 개인재산화하는 일까지 빈번해집니다. 

이런 폐단 때문에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십일조를 차지하거나 양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입니다.


중세교회의 비대함은 십일조 제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구 교회들이 성장하면서 십일조는 교구교회에 바치게 되었고, 교구 목사들은 배를 불립니다. 

교구에 있는 수도원은 십일조로 부를 축적합니다. 

이러한 타락상이 계속되자 종교개혁이 무르익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십일조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 성 마테우스 교회의 헌물함의 용도에 대한 모범을 마련합니다. 


독일에서의 농민전쟁 때에 농민들은 십일조에 대한 개혁요구를 합니다. 

이 개혁요구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십일조를 올바른 곳에 써달라고 요구합니다.

칼뱅도 십일조를 불연속적인 명령으로 보고 자율적 구제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십일조는 종교개혁이 무르익어가면서 프랑스 혁명 이후 서방 교회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가 20세기에 들어서 교회부흥과 함께 교회세력이 커가기 시작하면서 다시 머리를 들게 됩니다.

재미있는 발견을 하게 됩니다. 

십일조는 교회로서의 세력이 확장되어 갈 때에 함께 성장했습니다. 

화려한 성전이 있고, 화려한 교회가 있을 때에 십일조는 필요했습니다. 

한국교회에 특별히 십일조가 필요했던 것도 마찬가지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고비용구조. 한국교회의 건물중심 세력화와 십일조를 강제화하려는 것은 확실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최근 합동총회에서는 교인들의 십일조의무화를 공포했습니다. 

역사는 돌고 돕니다. 

중세교회의 눈먼 십일조구조를 만들었던 결정을 그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총회의 구조는 교황의 구조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웃음만을 샀습니다. 


십일조를 의무화 강제화하는 것에는 눈먼 비용의 구조가 있습니다. 

종교적 의무를 강제할 뿐, 그 내역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 제도가 종교권력에게 활용되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를 탈피하고 은혜의 선순환구조. 그리고 선물의 경제를 이루어감이 옳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창의적 방식의 재정구조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재정 에세이 5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십일조와 헌금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이 용어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는 없을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와 헌금에 덧씌워진 이미지는 무언가 거룩한 이미지. 손대어서는 안될 것 같은 이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하나님이 직접 받으실 것 같고,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신성불가침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용처나 사용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음의 사례들은 교회의 불투명한 재정관리의 예들입니다. 


어느 대형교회의 재정감사결과. 

목사는 교회기금으로 펀드에 기입. 목회비와 자녀유학비가 과도하게 지출.

100억원이 넘는 거금을 투자했지만 당회의 의결은 없었음. 


다른 대형교회. 

목사는 독일에서 열린 선교집회 강사로 다녀온다는 명목으로 교회로부터 1,500만원의 출장비를 받았으나 집회에 다녀오지 않음. 

목사는 출장비를 몰랐다고 항변. 개인통장으로 다른 명목의 거액의 돈이 입금되고 있기 때문. 

세 자녀의 유학비. 연간 교회 장학예산이 1억 7천만원 가량 되는데 그중 1억 2천만원 정도가 목사자녀유학비로 사용. 

교회헌금으로 1,400만원 돌침대 구매. 

그 목사의 연봉은 상여금 450퍼센트를 포함 1억 8천만원이며, 당회원들도 모르게 5년간 175퍼센트 상승. 

특별한 사용처 없는 목회지원비도 700만원 이상 매달 지급. 


게다가 목회자들이 공금을 횡령하는 일들도 빈번합니다. 

목사가 직접 헌금을 운용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고, 교회의 부동산들도 편의상의 이유로 목회자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의원재직 당시 누구나 중요한 일을 한다는 전제 하에, 원칙을 정하여 월급을 분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월급이 많은 사람은 노대통령을 평생 운전했던 최영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보과관이었던 이광재 의원은 가장 적은 월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교회가 아닌 곳에서 가장 교회다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을 7년간 운전했던 이는 전세값 200만원 빌려달라고 했다가 다음날 해고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소망교회 장로였던 이의 대처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 앞에서 근본적인 성찰과 새로운 적용을 해가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와 헌금을 대체하는 용어와 방식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이에는 성경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연보’라는 말을 통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헌금이라는 단어는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연보라는 말은 13번 등장합니다.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을 지키는 레위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대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 (대하34:9)


대제사장 힐기야는 사람들에게 거둔 돈을 여호와의 전을 수리할 돈으로 넘겨줍니다. 

이 금액은 성전세였을 겁니다. 

십일조는 양식이었는지라 그것으로 성전을 수리할 수 없습니다. 

성전을 수리 보수하기 위한 돈도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에게 거두어들인 성전세를 통해서 마련하였습니다. 


연보라는 말에서 ‘연’은 ‘버리다’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보’는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돈을 기부하여 돕는다는 뜻이 됩니다. 

연보라는 말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부행위를 의미합니다. 


교회에 내는 헌금과 기부행위는 별개인가. 

사실 교회는 별개처럼 느껴지게 했습니다. 

교회에 내는 헌금의 대부분은 교회내의 논리와 방식에 의해 지출이 됩니다. 

의미있는 곳에 지출하는 것은 교회헌금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NGO관계자에게 그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NGO의 주적은 교회다’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실재로 교회 교인들이 기부행위에는 인색하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과다한 헌금지출과 함께 기부행위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보다 의미있는 전진은 교회에 내는 돈이 그 자체로 기부행위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교회에 내는 돈만큼 용처가 불분명한 돈이 없습니다. 

거룩과 성스러움으로 덧칠하면 질문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기부행위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것이 적절하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노출은 필수적이며, 그에 대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재정은 여러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관리해야 합니다. 


바울서신에서는 이 연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자기 형편을 따라 얼마씩을 미리 저축해 두라”고 권면합니다. 

원어적으로는 “스스로” 혹은 “혼자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해놓은 연보를 바울이 올 때에 맡겨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도록 한 것입니다. 

연보는 각자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적으로 연보일을 정하여 그날에 연보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 같습니다. 


초대교회 때에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기부행위도 연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가운데 생활이 어려워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고 내어놓는 모금의 일종이었습니다. 


십일조의 의미를 살리고 싶다면 우리의 식비 중 1/10을 준비하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우리의 먹을 것 중에 1/10은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받는 이웃에게 나누어준다는 개념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회적으로 이 용도로 사용하면 십일조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잡다한 이야기를 했지만, 연보에 대한 원칙들을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있는 대로 한다. 

둘째, 준비하는 자세를 가진다. 

셋째, 마음에 정한대로 한다. 

넷째, 즐거운 뜻으로 한다. 

다섯째, 균등하게 되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한다. 


야훼의 밤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조성기 목사의 교회에서는 연보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적용합니다.


  1. 헌금이라는 용어 대신 연보라는 용어를 사용
  2. 여러 헌금의 명목들이 ‘감사와 나눔의 연보’라는 이름으로 통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이웃에 대한 나눔의 정신을 한데 묶은 연보
  3. 구약성경의 십일조 개념을 내세우지 않음. 어느 정도 연보할 것인지는 가정 내에서 혹은 개인이 결정. 각자의 기준을 존중. 
  4. 모두 무기명으로. 누가 어느 정도 연보를 하는지 아무도 모르게. 
  5. 주일연보 외에 한달에 한번 월정연보주일을 정하여 연보를 드림. 주일연보는 기본적인 신자의 의무로 여기고 매주 연보를 준비하게 하고 월정연보주일은 한달의 첫째주일. 이 첫째주일에 마음으로 모아 연보를 함. 
  6. 무건물, 자비량 목회를 원칙으로 하여 연보 대두분은 선교와 이웃나눔으로 쓰이게 됨


재정TF팀에서는 다음주까지 토론 연구한 후, 중간결과물을 월례회 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월례회 때에 여러분의 의견도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