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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풀어놓기

나는 왜 그루를 떠나보냈는가?



오늘 북서울IVF 학사회 간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난 달 북서울 IVF 블로그에 올린 글을 잘 받았다며, 이번 달에도 부탁한다는 것이다. 

인사차 한 말이겠지만 지난 달의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단다. 

나는 그랬냐고 무심하게 답을 했지만, 내 마음은 커다란 찔림을 얻었다. 

왜냐하면 지난 달에 블로그에 기고한 글의 주인공인 위의 커다란 개 그루는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묻고 넘어가고 싶은 이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학사회 간사의 전화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루를 통해서 드러난 나의 연약함에 대한 자기고백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는지 모르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난 이러한 집을 짓고 산다. 

이런 예쁜 집을 짓고 사니 주변 이웃들부터 내가 대단한 사장님인 줄 아는 것 같다. 

입주하면서부터 이웃들의 텃세를 남 부럽지 않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공동체 생활을 위한 것이다. 

아니 더욱 자세히 이야기를 하자면 초대교회적 공동체 즉 가정이 확대된 형태의 원초적 교회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큰 교회 청년부 목사직을 때려치우고 나왔다. 

담임목사님의 만류도 있었고 가족들이 철없다 여기는 눈길도 있었으나 소신있게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남들이 뭐라하든 내가 생각하는 그림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나갔다. 


공동체 하우스의 1층에는 청년들 다섯 명이 모여 산다. 

윗층에는 우리 가족 다섯이 모여 산다. 

이 집에 열명의 가족들이 오손도손 모여 살며, 여기에서 말씀묵상도 하고 모임도 가진다. 

현재는 오사카에서 온 DTS팀 8명이 일주일간 함께 지내고 있기도 하다. 

기도회, 예배가 드려지는 장소이며 청년들이 수시로 오가며 교제를 나누는 장소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구상했던 것처럼, 덩그러니 건물만 있는 교회가 아닌, 사람냄새가 나는 그리고 사람으로 북적대는 그러한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공동체의 가장 큰 문제는 나인 것 같다. 

공동체 생활이 한달이 넘어가는 시점을 살아가며 나는 지쳐가고 있다. 

형용할 수 없는 만성피로가 나를 지배해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 만성피로는 깊은 수면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집에서 잠을 제대로 못잔다는 거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조그마한 자극에도 잠이 깬다. 몸이 반응한다. 

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감이 과한거다. 

이 증상을 과다책임증후군이라고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이 과다책임증후군은 나를 만성피로에 젖어들게 했다. 

나는 분명히 무척 피곤하니 많이 잘 수 있을거야 라고 다짐하며 잠에 들어도 새벽에 일어나게 된다. 

잠시 말짱했다가 해가 떠있는 내내 피로감에 젖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중에도 공동체 하우스의 물건들은 잘 비치되어 있는지, 위생상태는 어떠한지가 끊임없이 보인다. 

너무 힘든 날에는 종합감기약을 먹고 잠에 든 적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커다란 개 그루였다. 

그루가 짖으면 천지가 진동한다. 

난세였다면 칭찬해줄만한 덕성이기도 했겠지만 평화를 원하는 이웃들에게는 커다란 위협거리였다. 

주변 이웃들이 수차례에 걸쳐 내게 와서 정말 그루를 키울 것인지를 물었다. 

정중히 다른 데로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루는 나를 보면 꼬리를 흔들며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내고 낑낑소리를 섞어 낸다. 

자기와 놀아달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그 눈은 나를 향한다. 

나만 조용히 사라지려고 하면 나를 향해 분명히 짖는다. 

그리고 나는 그루가 짖으면 온몸에 스트레스가 끼쳐 온다. 


그루는 왜 나만 바라볼까. 

가만히 혼자 분석해 봤다. 

이 집에서 내가 막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일등개(?)라는 것을 그도 아는 것 같다. 

내가 주로 명령하는 존재라는 것. 주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그리고 그녀석은 나에게 눈도장을 받으려는 것만 같다. 

이 아저씨만 잡으면 된다. 그런 인상이다. 

그리고 나는 그게 싫었다. 나만 바라보는 그 극명한 눈길이 한없이 불편했다. 


정원공사가 시작되는 날이 되었다. 

낯선 아저씨들이 등장하자 그루는 짖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짖기 시작하는 그루를 달래려 내가 출동했다. 

한동안을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좀 안정되었거니 하고 집에 들어가려고 하니 또 짖기 시작한다. 

아저씨 어디 가냐고...

순간 열이 받았다. 이 녀석이 나를 통제하려고 해?

무언가 강렬한 인상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석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때릴 것처럼 달려갔다. 그런데 그 무지막지한 녀석은 지가 좋아서 그런 줄 알고 같이 뛰어 온다. 

강하게 부딪혔다. 그 녀석도 이게 뭔가 이상한데 하고 느낀 것 같다. 

뭔가 쾌감이 느껴졌다.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데 또 그루가 짖는다. 

나는 다시 돌아서 그루를 향해 때릴듯 달려갔다. 

또 공중에서 그녀석과 부딪혔다. 로우킥 비슷한 자세로...

그녀석 멱살을 붙잡고 짖지마를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다시 짖으면 그짓을 하고 또 그짓을 하고...

일하는 아저씨들이 나를 구경했다. 


그러한 나를 향해서 누군가가 목사님 하고 불렀다. 

아 정말 싫었다. 


이틀동안 그짓을 한 것 같다. 

점점 하드코어가 되어 가고 있다. 

짖는 소리가 나면 나는  뛰어가서 그녀석에게 위협을 가하고 짖지마를 연발했다. 

내 밑바닥이 드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집에서는 함께 사는 이들의 연합이 존재하고 뜰에는 교제가 가득하며 그 뜰에는 정원에 걸맞는 얌전한 개 한마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아갔다.

이러한 꿈을 깨는 소리들은 사실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중에 가장 내 꿈을 와장창 깨는 것은 그 큰개 그루였다. 





커다란 개 그루는 절대 조용하지 않았다. 

맹인들을 안내하던 그 조용한 리트리버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보다 냄새도 났으며 그녀석을 만지면 나는 두드러기가 났다. 개알러지였던 것이다. 

하루에 세번씩 샤워를 한적도 있다. 

누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키우기 쉽다고 했던가. 

대형견 래브라도 리트리버에 대한 망상을 갖게 해준 이를 찾아내고 싶었다. 


그루는 그 꿈을 계속 유지할 것이지 아니면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꿈을 꿀 것인지를 묻는 바로미터와 같았다. 

그리고 공사 이틀째 결국 그루를 달라던 페인트 사장님에게 연락을 했다. 

대형견들이 모여산다는 그 회사에 가서 개들끼리 좋은 세상 이루라고 말하고 싶었다. 


결국 공동체 생활은 현실이다. 

나의 실체와 한계를 보여주는 지독한 현실이다. 

나는 이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 생각이 앞서는 것으로 인해 처절하게 고통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아내는 그루의 일로 내게 할 말이 많다. 

왜 성급하게 그루를 데려왔느냐는 것이다. 

매사에 꼼꼼하게 준비하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섣부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정원의 대형견은 공동체에 대한 꿈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기에 개를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가족들이 무한도전을 생방으로 보고 있을 때에 나 혼자 그루를 산책시키다가 페인트 사장님을 맞이했다. 

위를 향해 "그루 간다!"하고 외쳤지만 우리 식구 중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내 소리를 듣고 1층의 식구들이 나와 주기는 했다. 

그래도 그루가 너무 조용히 떠나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그루의 사료, 그루를 위해 사주었던 개목걸이와 다른 도구들을 챙겨주었다. 

나와 똑같은 차 카니발을 가지고 온 사장님의 뒷좌석에 좋다고 올라탔다. 

그리고 나도 탈 줄 알았나 보다. 

차문이 닫히고 사장님이 출발하려고 하자 그때부터 녀석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인사하는 동안 뒷창문에 기대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미안했다. 많이. 


내 부족함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내 연약함 때문에 주변이 힘들다. 

그러나 나는 원래 부족하고 연약하다. 

집하나 완벽하게 책임질 수 없는 존재다. 

망상을 꾸고, 망상에 현실을 맞추려고 하는 천상 NT 5번이다. 


그루가 간 후 아내는 며칠간 울었다. 

혼자 멍하니 있으면서 그루 생각을 했다. 

건우는 하루 정도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은우는 아빠를 때리며 아빠 때찌를 외쳤다. 

난 당혹스러웠다. 

이들은 밥을 주라고 할 때 귀찮아 했으며, 그루를 잘 만지지도 않았던 이들이다. 

이들은 그루를 보낼 때도 무한도전 가요제편을 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 홀로 서울에 와 있다. 

고맙게도 일이 있어 주었다. 

하루 걸러 계속 서울에 있어야 할 일이 있어서 홀로 낯선 곳에서 이렇게 글발을 날리고 있다. 

아내가 기겁하겠지만 어제오늘 여름대작들을 3편이나 보았다. 

곧 세편짜리 영화리뷰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근 한달만에 잠을 깊이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8시가 넘었다. 

점심에는 간사후배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들을 겪은 그 친구에게 사실 별로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없었다. 

힘들었겠다. 


그 친구는 내게 공동체 이야기를 듣더니 한마디 했다. 

그거 간사님이 다 책임지는 거에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내가 다 너무 책임지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믿음도 안식도 놓치고 살았던 것 같다.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자 안식이 생겨나는 것을 느끼는 지금, 내가 그 현실로 돌아갔을 때에도 믿음으로 안식하며 평안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그루를 떠나보냈는가?

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이다. 

결국 그루가 생각속의 개와 달랐기 때문이며 생각으로는 내가 그루를 감당할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실제로 나는 개알러지로 고통받는 체력저질의 아저씨였던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겠는가. 

이런 일이 생겨날 때 나는 그루를 생각하련다. 

그루를 떠나보내야 했던 나의 연약함을 생각하며 그루의 이름은 영구결변화 할 것이며 나의 연약함의 이름과 그루의 이름을 함께 기억하련다.

그루야 . 대형견 세상에서 행복하게 지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