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폴의 '손대접'을 읽었다.
책의 요지는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교회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손대접의 전통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이 방문한 손대접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들의 풍성한 예를 들고 있다.
교회는 손대접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었다.
교회가 특정 건물이 아니었던 때에 이웃을 만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중요한 방식이 바로 손대접의 방식이었다.
이러한 손대접은 교회 안에서 세밀하게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었다.
초대 교회의 문서에는 이러한 손대접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손대접의 전통은 교회가 폐쇄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으로 모든 가정들이 문을 걸어잠금으로써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딘가에서 환대를 받고 싶어한다.
여기에서 환대라는 것은 아무런 조건없이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얼마나 조건이 많고 이해가 복잡한가. 점점 이렇게 되어가는 세상에서 그저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는 것은 영혼을 소성케 한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을 대하면서도 이들이 교회 안에서 환대받지 못한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일꾼으로만 대하고 조건적으로 대하는 것은 그들이 교회를 자신의 공동체로 받아들이기에 심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반면 이들을 향한 작은 환대가 그들을 기쁘게 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본다.
그들이 시간이 있을 때 교회가 아닌 자신을 환대하는 까페를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디 교회 안의 젊은이 뿐이겠는가.
눈을 좀더 열어서 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 환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인생을 살아간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더이상의 호의를 기대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어가는 이야기는 마음을 힘들게 한다.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에 인색해져만 간다.
오늘은 도시가스 인입을 위해서 두 이웃집을 찾아갔다.
저녁 8시에 찾아갔는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썩 친절하지 않다.
나에게 따지고 드는 것을 차분하게 설명하려고 해도 왜 자신들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지 나에게 따져든다.
믿지 못할 세상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은 드면서도, 이웃의 일에 이렇게 이기적으로 반응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이 전세난이다.
젊은 부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몇년 안에 전세가 몇천씩 오른 집이 많다.
몇년 안에 몇천씩은 벌어야 빚없이 전세에 살 수 있다.
세상이 모두 자기만 살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우리의 이웃들은 어디에선가 환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간다.
공동체가 있는 교회 하나 세워놓고 뭐가 달라진다는 건가.
사실 그렇다.
우리는 정부도 아니고 힘있는 관공서도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향해서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보고 싶다.
손대접이라는 도구는 자신의 이기성을 버리고 보다 이타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몇 주간 우리 집으로 손님들을 들이면서 느끼게 되는 것도 그것이다.
지속적인 손대접은 나를 부지런하게 하며 깨어있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손대접의 깊이있는 세계를 좀더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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