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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묵상하기

창세기 21장 묵상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로 그날에 사라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1)

 

하나님께서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17)

 

아이가 자라는 동안 하나님께서 아이 곁에 계셨다. (20)

 

하나님은 1년 후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신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게되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고통도 지켜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행하시는 면을 보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자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신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말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가정에 행하신 일도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더딘 진행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듯 계시며, 안 계신 듯 하지만 동행하시는 분이다. 

 

아이를 광야에 뉘여놓고 죽기를 기다리는 하갈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았을까?

바란 광야에서 활잡이가 되어가는 이스마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들은 철저한 하나님의 부재의식 가운데 살았을 것이며,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정의의 시행의 관점에서는 형편없는 세상이다.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지를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힘들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이다. 

어제는 모범형사 8회를 보고 잤는데, 자는 내내 나쁜 꿈에 시달렸다. 

잘못된 정의를 바꾸어보려고 노력했던 이들의 노력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죄없는 사형수가 사형을 당하면서 8회는 마무리된다. 

그 허탈감이 내게도 전달되는 듯 했다.

 

새벽에 여름이가 죽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여름이가 현관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꿈이었다. 

전에 죽은 흰눈이를 혼자 치우며 느꼈던 트라우마가 느껴졌다. 

둥그런 눈을 뜬채 움직이지 않고 굳어가던 흰눈이를 아이들이 상처받을까봐 혼자 땅에 묻었다. 

그런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 드라마는 해피엔딩을 기약하기에 봐줄만 하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실제의 이야기는 정의는 사라진 채 기약이 없다. 

페미니즘에서는 약자 하갈을 박해하는 아브라함과 하갈, 그리고 하나님을 비난한다. 

손쉬운 비난이다.

 

고통이 있고 정의가 시행되기 어려운 이 세상을 메꾸어가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님과의 진짜 소통이다. 

그 가운데 마음이 다스려지고 인내가 생겨나며,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것을 상황의 합리화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이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화병에 걸릴 것 같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불합리한 중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가야 한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알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워지는 것이 된다. 

 

감사의 제목

 

여름이가 오늘은 좀더 활발하다. 눈에 눈물이 맺히고 눈꼽이 끼는 것을 보니, 몸이 여전히 좋지 않은 것 같기는 하다. 오늘 건강이 나쁜 개들에게 좋다는 닥터슈젠을 받기로 했다. 여름이가 더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집에 있으니 좋다. 영양가 있는 식사를 먹을 수 있고, 하루 종일 아이들 상태에 매여 있던 내가 좀 자유로워졌다. 이 시간 동안 영육간에 회복이 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아. 아내가 출근을 하지 않으니 아침에 셔틀을 운행하지 않아서 늦잠을 잘 수 있다. 그것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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