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는 127년을 살았다. 사라는 오늘날 헤브론이라하는 가나안 땅 기럇아르바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그녀를 위해 슬퍼하며 울었다. (1-2절)
사라가 죽었다.
이 본문은 평소에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관한 내용으로 강조해 왔지만, 오늘은 사라의 죽음에 내 시선이 머무른다.
아브라함은 죽은 사라를 위해 슬피 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아니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이 죽음은 존재하던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그래서 더이상 찾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존재를 비존재로 바꾸어 버리는 폭력적 상황 앞에 무기력하게 서 있을 뿐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이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어디를 향하는 슬픔인지 헤아려지지가 않는다.
그 슬픔은 멍하니 있을 때에 불쑥 치고 올라와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으로 몰고 간다.
젊다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떤 친구는 공부를 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사시준비를 하던 장래가 촉망되던 친구였다.
어떤 친구는 과로로 병을 얻어 아내와 아이를 두고 죽었다.
그 이후 아내였던 동기의 힘겨운 삶에 대해서 들어야 했다.
나름 제자라고 불리었던 후배는 의료사고로 갑자기 죽었다.
한참 후에야 그 소식을 듣고 황망해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이 드시고, 치매가 오고, 여러 합병증이 있는 상태에서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모든 죽음에는 그만큼의 무게가 존재한다.
그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책으로만 보던 죽음을 조금씩 겪어가면서 여전히 질문받게 되는 것은 내가 그들을 존재로 사랑했는가 질문이다.
내가 그들과의 이별을 후회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것이 내게는 후회가 되었다.
좀더 연락하고 좀더 신경쓰고, 좀더 사랑할걸 하는 후회.
사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눈물도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믿음의 여정을 함께 하던 동지인 사라의 죽음이다.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동지인 사라를 버리는 듯한 행동도 했다.
그럼에도 사라는 남편인 아브라함을 한결같이 따랐다.
아브라함의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의 여정에서 사라의 지지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러한 도움 없이 홀로 나머지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도 내게 맡겨진 존재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은 이곳저곳에서 불쑥 우리에게 다가온다.
반갑지는 않지만, 우리의 존재의 방식이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죽음에 걸맞는 무게로 사람을 대해야 겠다.
감사의 제목
그저 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존재들을 만나고 있음에 감사하다.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음이 감사하다.
여름이는 이제 활발해져서 아이들과 잘 놀고 있다. 다시 생명의 활력을 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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