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다가 물이 솟아나는 샘을 발견했다. 그랄 지역의 목자들이 "이 물은 우리 것이오"라고 주장하며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다. 이삭은 우물을 두고 다투었다고 해서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고 했다. 이삭의 목자들이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것을 두고도 다툼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라고 했다. 이삭이 그곳을 떠나 또다른 우물을 팠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우물을 두고 다툼이 일지 않았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한 땅을 주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퍼져 나갈 것이다." (19-22)
이삭의 종들이 솟아나는 샘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샘은 그랄에 속한 땅이었기에 이삭의 종들은 그들에게 밀려났다.
일종의 텃세다.
그리고 자기 세력과시이다.
나그네에 불과했던 이삭과 그의 종들은 양보해야 했다.
다른 우물을 찾았을 때에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이삭과 그의 종들에게 복을 주었으나 구조적인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삭은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랄에 살고 있는 이삭은 아무리 농사가 잘되고, 우물을 발견해도 그랄에서 그는 나그네다.
그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고, 거주자들의 자비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잠정적일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 나그네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땅을 우리 집처럼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이 땅을 우리 집처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생고집이 생겨난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교회는 그동안 이 땅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고 많은 것을 쌓기에 바빴다.
나그네 답지 않는 건물과 영예를 누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점점 가능해지지 않는 위치로 향하고 있다.
오늘 다음 메인기사에는 교회에서 잘려나가는 전도사와 부교역자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약한 이들이 먼저 희생되고 있다.
결국은 그동안 쌓아놓은 교회가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하게 될 것이다.
세번째로 만난 우물에서 다툼은 그친다.
이삭은 그곳을 충분히 넓은 곳이라는 이름의 르호봇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땅에서 분쟁이 없어진 것은 그곳이 충분히 넓었기 때문이고, 그랄 사람들이 그다지 살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더이상의 분쟁이 없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랄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온다면 다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잠정적 축복이다.
그러나 이삭은 그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그 구조적인 부조리를 해소해주지 않는다.
그저 농사가 잘되게 해주시고, 우물을 발견하게 해주신다.
이삭은 그 잠정성을 그대로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일시적 번영을 복으로 인식한다.
근본적 나그네성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받는 위로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러하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은 약속된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약속된 것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된다.
우리의 삶은 계속적 다툼이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에서는 계속적으로 에섹과 싯나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가 가끔씩 르호봇이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그저 그럴 때에 감사하며 살 뿐이다.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음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원래 그렇다는 것은 인정하면 맘이 편해진다.
우리는 원래 나그네로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오늘도 그저 하나님의 르호봇을 잠시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하자.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소망을 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감사
하나님의 르호봇 가운데서 쉬고 살고 먹으며 교제할 수 있음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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