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압제에서 건져 내시면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온갖 선한 일을 듣고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와 바로의 권력에서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소서.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신들보다 크시다는 것을 이제 내가 알았네. 그분께서 이스라엘에게 오만하게 굴던 모든 자들에게 이 같은 일을 행하셨으니 말일세." (9-11)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은 이집트로 가던 중, 그들을 죽이려는 천사를 만나고 돌이켜 미디안으로 가게 된다.
아마도 좋은 기분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보기 어려운 분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후에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처와 두 아들을 데려다주러 다시 모세를 찾아오게 된다.
이에서 궁금한 점이 있다.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했다.
요셉은 이집트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집안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 불화나 어려움은 없었을까?
그들이 이방에 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이드로는 그 모든 되어진 일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얼핏 보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 한 바울의 이야기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백성들을 재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세에게 조언을 한다.
모세의 일이 지나치게 과중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세워서 조직의 지도자로 세우라고 한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직책은 이스라엘의 전통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듣고 그대로 일을 처리하여 재판의 효율을 높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타종교나 다른 사회에 대해서 그렇게 배타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대적하는 문화가 있으나 그것은 그저 타문화나 타종교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 문화나 종교 안에 분명하게 개입되어 있는 창조질서의 왜곡과 대치가 존재했던 것이다.
오히려 현재 형성된 기독교, 대한민국에 형성되어 있는 기독교에는 성경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배타성과 배척의식이 존재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의식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맹목적으로 어떠한 대상을 미워하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그러한 기독교의 태도로는 함께 살아가기가 어려워 보인다.
이제 어디가서 목사라고 하기가 조금 꺼려진다.
뒤통수가 따가워지는 경험도 한다.
교회가 혐오집단 혐오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더불어 하나님의 이름도 땅에 떨어지고 있다.
모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을 느끼게 했다.
교회가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이 시대에 이웃과 함께 존재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아야 겠다.
감사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를 길게 사용할 수 있어서 감사
가족들과 저녁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
늦었지만 말씀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감사
기도
이 시대에 교회로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