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나 고아를 학대하지 마라. 너희가 그들을 학대해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그 부르짖음을 반드시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내가 몹시 진노를 드러내어, 칼을 들고 맹렬히 너희 가운데로 갈 것이다. 그러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될 것이다. (22-24)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물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라. 그에게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인데,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네 이웃이 추워서 부르짖으면,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다. (26-27)
하나님은 개인의 소유물이나 가축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더욱 보호하고 지키기를 원하시는 것은 과부나 고아, 가난한 자들의 삶이다.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의 삶을 지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그 목소리 톤에서 드러난다.
몹시 진노를 드러내어 칼을 들고 맹렬히 너희 가운데로 갈 것이며, 내가 직접 나설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그렇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무엇을 지키려고 하시는 것인지가 드러난다.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세상을 지키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난한 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가치가 지켜지고 삶이 지속되는 공간이다.
이것이 무너지는 것은 가진 자들의 욕심 때문이며, 약한 자들을 희생시키는 구조이다.
이것이 해도해도 너무한 지경으로 흘러가게 될 때에 하나님은 참지 못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금융이 부의 핵심엔진이 되면서 진정한 자본주의의 세상이 되었다.
이미 부가 있지 않으면 그것을 극복해낼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이 난망하다.
서울역 인근의 쪽방촌에 사는 이들이 내몰리게 되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곳의 자리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쪽방촌이 사라지고 거기에는 고급 아파트가 서게 될 것이다.
서울 후암동에서 부목사로 살아갈 때에도 서울역 옆에 고급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 오래된 주택들이 사라져갔다.
그로 인해서 일명 대박을 친 교인들도 있고 그랬다.
그것 때문에 감사해 하고, 그로 인해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개발로 인해서 내어쫓긴 이들의 삶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 같다.
진정한 개발은 살던 사람들이 내어쫓기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개발은 아직 없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부의 양극화의 흐름이 그치고 새로운 기류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코로나는 이러한 기류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다.
새로운 경제의 가능성만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은 이로 인한 고통이 가중되고 있는 형국이다.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문제와 경제적 코너로 몰리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 어두움을 통과하여 좀더 나은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고아와 과부에 민감하신 하나님은 다음 세상을 만들어 가시리라 믿는다.
감사
연휴가 끝나고 새로운 한주를 주심에 감사
기도
다가오는 새로운 문명에서는 고아와 과부들이 더 살기좋은 세상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