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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풀어놓기

르네 지라르를 통해 인간을 생각하기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됨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물학적 혹은 신경생리학과 같은 신체적인 학문의 방식으로 혹은 심리학이나 철학과 같은 해석학적인 방식으로도 인간을 설명할 수 있겠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같은 책을 보노라면, 인간됨이 한없이 왜소하게 느껴진다. 

나의 인간됨이 저 사람에게는 저토록 적나라하게 그리고 설명가능한 것을 느껴진다고 생각하니 내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적어도 인간됨에 대한 설명은 보다 지향점이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리 중심의 인간론은 그 매력을 잃고 퇴화하는 중인 것 같다. 

보다 인간을 적실하게 표현해줄 방식이 필요하다. 

왜 이것이 그토록 중요하냐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참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아간다. 



1996년 이탈리의 파르마에서 어떤 연구가들의 모임에서 '거울신경세포'를 발견했다. 

이는 뇌 속에서 우리가 일단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세포들이다. 

과학자들은 우리 뇌 속에 작은 복사기와 같은 기능을 하는 세포들이 있다는 식으로 정리했다. 


우리는 보고 행동한다. 

우리는 모방으로 배우며, 어떤 의미에서 모방이 배움이다. 

우리는 모방을 내장하고 있고 태어나면서부터 배운다. 


우리는 성공하고 싶고 유행을 따르고 싶고 흥행한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나는 요즘 고전이라고 인정하는 책들을 무턱대고 읽고 있다. 

보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마저도 모방을 통해 배운다. 

서구 기독교의 사고의 방식으로 혹은 플라톤적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다. 

이것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보고 배울 새로운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존재로 이 땅에 왔다.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르네 지라르는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폭력을 모방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들은 계속 싸우면서 자신의 반응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시켜서 심지어 다른 이들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로 군중폭력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보복을 더 강화시키면서 폭력을 증가시켜간다. 


그래서 군중이나 그룹을 제어하는 것이 사회적 관심사가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이것이 초기 인류 조상들이 수행한 종교의 역할이라고 설명한다. 

예수의 수난이야기에서도 군중의 폭력전염의 효과를 본다. 

점점 폭력은 심화되어 예수를 죽이게 된다. 


여기에서 한가지 전형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증가하는 폭력의 해결책으로 희생양을 찾는 사람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가하는 폭력의 전형성을 원죄로 해석할수도 있겠다. 

합당한 희생양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증가하는 폭력은 서로를 파괴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는 이러한 증가하는 폭력의 문제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보복적이지 않은 폭력의 희생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샬롬이라는 화해의 언어를 가지고 왔고 이 언어로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 평화, 용서의 기초가 된다. 


우리가 예수를 참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러한 참 인간이 되는 것은 이러한 예수의 순응을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증가하는 폭력의 문제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만나서 그 고리가 끊어지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인간의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더 넗게 생각해 보자. 

성서는 다른 신화와 역사에서 중심이 되는 폭력을 취하지 않으려고 한다. 

성서의 이야기는 신성한 폭력의 문화적 종교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것이 사악하고 저주받은 것임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예수의 복음은 인간의 문화가 지닌 폭력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다. 


월터 윙크는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저서에서 이 비폭력의 계시가 예수 안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며, 폭력의 구원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예수가 연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예수가 열어놓은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됨으로 성서를 새롭게 보며,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구약의 메시지도 폭력적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샬롬을 이루어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고, 예수의 메시지와 삶은 그것이 성취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의 방식을 얻게 된다. 

우리 안에 증가하는 폭력의 문제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선택함으로 꺽여져야 한다. 

세상을 모방하며, 남들이 가지고자 하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것에서 돌이켜 모방해야 할 유일한 대상으로 향해야 한다. 

인간을 아는 이가 예수를 통한 역전을 꿈꾸신다. 

예수는 우리에게 참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을 여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