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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풀어놓기

마흔, 나를 새로이 찾아가다

 

내 안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전의 나와 다른 나의 결을 느끼고, 이전처럼 살지 못하는 나를 느끼면서 당황스럽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생각하고 노력해보지만 그게 예전처럼 잘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변화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며, 그 새로운 자아에 익숙해지고 항로설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찾아보니 마흔 즈음에 이러한 혼란을 겪는 것은 나만이 아는 것 같다. 

중년의 위기, 하프타임, 중간항로 등 다양한 용어로 이러한 시기를 지칭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그러한 시기를 겪은 이들이 전해주는 조언을 들어보기로 했다. 

 

잠정 인격이라는 것이 있단다. 

이는 부모와 사회와 문화가 물려준 성격이다. 

중간항로에서 알아야 하는 것은 가족과 문화로부터 얻게 된 렌즈가 실은 완전하지 않으며, 세상의 일부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그리고 불완전한 렌즈를 통해 결정을 내려왔고 그 결과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인정하고 그것이 내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뭐랄까 자존심이 상한다고 할까.

그것도 나 자신이었던 것 같은데 하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성장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자신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고난 본성과 사회화된 자신 사이에서 그저 신경증 환자 수준으로 생존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여전히 잠정인격에 머물러 있으며 그러한 인격에 사회화된 껍질을 씌워 직면하지 않은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숙고하지 않은 성인기는 유년기의 다양한 트라우마를 지닌 '내면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내면아이는 유년기의 경험에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는 자아이다.

그때에 중요한 경험은 무시당하거나 버림받은 경험, 삶의 무게에 짓눌린 경험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아이의 상태에서는 무시받지 않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혹은 삶의 무게를 지탱해 내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정서상태로는 나 자신을 만나기 어렵다. 

여전히 유년기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내면아이로 살아갈 뿐이다.

 

마흔의 위기감은 내면의 자기감과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격 사이의 불균형이 커지면서 찾아오게 된다. 

이 불균형이 점차 커지면서 이전처럼 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상 상실'이라고 한다. 

예전에 사용하던 태도와 전략을 계속 써보지만 더이상 통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성인이 되어간다는 것과 내면아이의 정서가 원래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이전에 자기감을 형성하기 위해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러고 있는 나를 부모님은 대견해했고, 내가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 제일 그럴듯 하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자기감이 부족해질 때 그러한 상태로 나를 내몰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배우자 앞에서도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배우자는 그러한 모습을 회피로 인식하더라는 것이다.

이에서 정체감의 혼란이 찾아왔다. 

내가 공부하거나 책을 읽어도 인정받지 못하며 오히려 그것은 나의 일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내게는 다소 새로운 것이었다. 

 

마흔의 위기감은 이렇듯 이전에 형성된 나의 메카니즘이 더이상 통하지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비롯되는 듯 하다. 

공부를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체력도 되지 않고 눈이 침침해질 때가 있다. 

이전보다 더 많이 쉬어야 하고 몸의 한계를 느낀다. 

그리고 무엇을 매우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데 그렇게까지 공부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을 때가 많다. 

이 책 저 책을 살펴보지만 그다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열심을 끌어내는 방식은 준미래적 전망을 밝게 유지하는 것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이렇게 하다보면 뭔가 될거야 라는 생각. 

기도와 말씀묵상을 열심히 했던 메커니즘도 그러한 생각이 작동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준미래적 밝은 전망에 대한 기대가 점차 사라져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당황스럽다. 

나는 무엇을 바라며 나 자신을 형성시켜 갈 것인가. 

 

마흔 즈음의 나를 돌아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나의 존재로 살아가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래의 나를 설정하기 보다는 그리고 그것으로 힘을 얻기보다는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내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현재의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만족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무언가를 함으로써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하며, 놀며, 즐기는 나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것이 내 존재증명을 하지 않더라도 현재에 존재하며 그 행복감을 누려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지?'라고 질문하는 그 질문 자체를 폐기 혹은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내게 어울리는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나는 지금 '현재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질문.

그러한 질문을 하며 새로운 항로설정을 해야하지 않을까.

아직은 미약한 질문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