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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풀어놓기

중간항로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암시들 1

 

20세기 들어서 보건의료 분야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은 40세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늘어난 수명으로 인해서 중간항로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게 된다. 

오늘날 수명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중강항로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은퇴 후에도 평균 20년 이상 지속되는 삶의 문제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현재의 인간은 평균적으로 매우 오래 살며, 그로 인해서 다가오는 생애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이전의 세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일 수 있다. 

과거의 시대정신은 규정성이 강했고 예상되는 정형의 삶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은 전형적인 삶 속에서 안주하거나 안심하며 살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현재의 시대정신의 특징은 기성 사회제도가 쥐고 있던 심리적 권력이 급격하게 개인에게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거대 이데올로기가 그 정신적 힘 대부분을 상실하고 현대의 개인은 일종의 고립상태에 빠졌다. 

이는 인정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현재 정신의 무게중심은 사회제도에서 개개인의 선택으로 옮겨지고 있다. 

중간항로의 문제는 무거워진 개인의 선택과도 관련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 처형을 당하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이토록 끔찍한 수용소를 만든 것은 진정 신의 뜻인가?"라는 주제로 깊이 고민했다.

고민 끝에 그는 자신이 이질문에 답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지금의 공포를 받아들이고 이를 헤쳐나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우리는 이처럼 삶의 중간항로에서 부딪히는 여러가지 충돌을 경험하며 갈등의 의미를 분별해 내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고 삶을 다시 찾아야 유아적 심리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본회퍼가 이야기한 성인의 세계는 이러한 고민을 통과한 세계일 것이다. 

중간항로는 개인이 삶의 의미라는 질문을 새로이 던질 수 밖에 없을 때 일어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 삶과 역할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중간항로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삶의 지진 암시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사고방식이 변하게 된다.

아이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이러한 아이의 주술적 사고는 '나는 죽지 않아. 나는 유명한 사람이 될거야. 부자가 될 거고 늙거나 아프지 않을거야'라고 가정한다. 

사춘기의 고통과 혼란을 거치는 동안 아이의 주술적 사고는 거센 역풍을 맞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검증되지 않은 깊은 심연의 자아는 '영웅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 

영웅적 사고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꿈과 비전을 이야기하지 않고 삶의 쓰라림을 이야기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일이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영웅적 사고를 하며 이것저것을 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젊음은 약속된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유년기의 주술적 사고와 사춘기의 영웅적 사고가 우리가 경험한 삶과 더이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중간항로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중간항로에 들어선 이들은 실망과 가슴아픔을 충분히 겪고,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 기대가 무너지는 일을 겪었다. 

자신의 재능, 지성, 용기의 한계 역시 경험해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현실적 사고를 하기 시작한다. 

이 현실적 사고가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흐르는 것은 비관적이다. 

중년의 현실적 사고에는 삶의 균형이 필요하며,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삶은 전체 세상의 부분에 불과하며, 작게나마 우주에 나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전 생애 동안 우리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다.

약 7-10년 주기로 우리는 육체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거친다. 

14, 21, 28, 35 이 7년의 주기의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 각각 그 시기마다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각 주기마다 인도와 지도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학과 인류학 저자들은 인간이 문화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찾아주는 신화라는 로드맵을 상실해 버린 것 같다고 지적한다. 

각 문화들은 통과의례라는 것이 있엇고 그것을 통해서 그 문화속에서 살아가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에는 통과의례라는 것이 없고 그저 개인이 그 항로들을 통과해야 할 뿐이다. 

전통의 통과의례는 보통 여섯 단계로 이루어진다. 

부모로부터의 격리, 의존적 유년기를 살해하는 과정, 성인으로 새로이 탄생했음을 인정하는 과정, 개인의 시련을 통과하는 시련 그리고 통과의례를 마친 개인이 공동체에 필요한 지식과 내면의 힘을 지니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 통과의례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들을 우리 삶에서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2차 성인기, 즉 잠정 정체성을 버리고 거짓된 자기를 죽이고야 얻을 수 있는 성인됨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인됨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한성 즉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실존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명명했다. 

인간은 이 죽음 앞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진지해지며 성숙해질 수 있다. 

 

유아적 기독교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실패하지 않으며, 죽지 않으며, 언제나 즐겁게 찬양할거야.'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이러한 유아적 기독교는 진정한 현실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특징이 있다. 

성인기로 넘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유아적 상태에 머무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의 성숙은 죽음을 실체로 인정할 때에 이루어진다. 

늙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노쇠와 죽음을 그 실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존재로서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묵상해야 한다. 

죽음은 회피해야 할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실체를 오롯이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