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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풀어놓기

6. 포스트크리스텐덤, 그리고 개인의 자유

복음주의는 크리스텐덤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크리스텐덤의 혜택을 보았고, 또 한편으로는 크리스텐덤 바깥에서도 지속성을 유지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잠시 복음주의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복음주의는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개인회심 중심의 신앙운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미국은 좀더 근본주의적 경향으로 치우쳤다면, 영국의 복음주의는 현실의 문제를 폭넓게 살피려는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회심. 그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회심한 개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동안 했었다. 

회심 이후에는 성령이 이끌어가는 삶이 시작되며, 그 삶은 아주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되는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심한 개인도 얼마든지 무너지고 돌이키고, 심지어 그 길에서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게 되었다. 

그것을 보며 깨달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회심한 개인 안에 거하는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 그 믿음에 근거해서 공동체의 선한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심한 개인의 선한 것을 모아주고 그것을 북돋아주는 것이 교회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생각에 대한 회의가 생겨나고 있다. 

 

복음주의가 가지는 숙제는 이 시대의 사조와 결합하여 진행된다. 

회심한 개인은 이 시대에 속해 있는 개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개인은 개인의 자유가 극대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영향을 받는다.

복음주의가 가진 문제는 신앙의 문제가 개인의 영역 안에 갇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바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가 실질적으로 미약하다. 

 

물론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둘 다 중요하다고 지적하는 흐름도 있었고,

근본주의와 결합하고 비지성적인 흐름을 가지게 되는 복음주의에 지성의 세례를 더하려는 흐름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저 당위적인 모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복음주의는 그 다음의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에 대한 대안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심 중심의, 단지 칭의 중심의 복음이 아니라 삶와 체계까지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 논의도 실체가 없는 무엇처럼 느껴졌다. 

뭐랄까. 그 알맹이를 이야기하기도 전에 개념설명을 하다가 길을 잃은 느낌이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을 구약에서부터 신약을 관통했을 때에 드러나는 지극히 윤리적이면서 실천적인 '공의와 정의'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왜 이것을 이토록 어렵게 이야기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어려운 것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하는 어려움,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넘어선 이 시대의 우상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기에 느끼는 어려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실체가 불분명한 것에 대한 어려움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그다지 근접해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겨우 어설프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하며 몇몇이 입으로만 떠드는 수준이다. 

 

우리는 이러한데 세상은 더욱 강력해지는 듯 하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에너지는 해마다 증폭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에는 피차간에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틀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틀이 판판이 깨어지는 것을 본다.

그래서 전에는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틀 안에서 개인의 자유를 여유롭게 인정해주면 쿨한 존재가 되었으나, 이제는 그럴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문제의 핵심에는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본다. 

가나안 교인의 현상은 일차적으로는 한국교회의 병폐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지만, 더 깊숙한 지점에는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의 관념과 맞닿아 있다. 

이 개인의 자유의 개념은 결국에는 불편하게 교회라는 구조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를 묻게 될 것이다. 

이는 포스트크리스텐덤을 경험한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이 개인의 자유의 감성이 발달해가고 있는 세대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현재의 교회의 틀은 이러한 세대들을 감당할 수 없음을 점점 깨닫게 될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내가 교회를 시작하고, 그 교회를 지켜보면서 점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회심한 개인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되었다. 

그들의 선의가 모이면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낭만에 가깝다는 것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그게 그렇게 흘러가게 되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몇년이 지나고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 우리를 붙들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복음주의자의 라인을 벗어나 전통주의자의 그것을 취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신비를 인정하고 그 전통 안에 기꺼이 머무르려는 자세에서 오래된 지혜를 얻어가야 함을 느끼게 된다. 

세상의 질문은 더욱 복잡하고 답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요즘 이슈가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것은 폭넓은 이해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다. 

오히려 이 시대의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더욱 핵심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고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대한 낭만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될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고 기독교가 형성해 놓은 오랜 전통 속에서 다시 길을 찾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포스트크리스텐덤의 초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의지했던 헛된 것을 버리고, 우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