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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삶 그루터기

나는 낭만적인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어제는 토지대금 중도금을 지급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자살한 청년부 친구를 보내는 날이기도 했다. 


꿈이 현실이 되어간다. 

아울러 네가 정말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묻는 질문도 거세어진다. 


어떤 이들은 집을 지으니 좋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집을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취급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런 질문을 들으면 내가 낭만적인 삶을 살기 위한 작심을 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지금까지 축적해왔던 모든 것을 이 하나에 투자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는가. 


꽃다운 한 청춘이 스러졌다. 

그놈의 취업이 무엇이라고 그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은 자신을 한하면서 이 세상을 떠나갔다. 


아무도 그 아이의 고민을 몰랐다. 

부모조차도 그 아이의 고민을 나누지 못했다. 

셀모임은 선택적이니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교회에 와서 멀거니 설교를 듣다가 사라지는 녀석이었다. 


그 아이의 장례를 치르며, 나는 무얼 하는 인간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들었던 마지막 주일설교를 내가 하지 못함이 갑자기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소망이 없어서 죽기도 하는 청년들 앞에서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내가 그러한 사역대상들을 대하며 할 수 있는 것이 참 왜소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진정한 상태에 접근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어제는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그 아이가 나의 삶을 어디선가 물끄러미 보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아이들을 돕는 삶에 나는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기는 한 것일까.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시우가 태어나고 정신이 없어서. 그리고 감기에 걸려서 쉬었던 기도시간이다. 

다시 하나님 앞에 머무를 때에 나는 이 세상을 느낀다. 

어두워져만 가는 그리고 소망이 사라지는 세상 말이다. 


그 가운데서 나는 싸우며 살아야 한다. 

그 싸움은 더욱 최전선으로 가는 싸움이 될 것이다. 

더욱 최전선으로 더욱 최전선으로...

나의 삶의 전환의 포인트여야 한다. 


나는 낭만적으로 살기 위해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