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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하기

[책] 사람, 장소, 환대

저자는 그림자를 팔아버린 남자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탐구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영혼은 아니다. 영혼은 아니되 매우 본질적인 것에 해당한다. 

그는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여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가 되고 만다. 

여기에서 저자는 어디에 속한다는 것의 의미를 궁구한다. 

이는 단지 소속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자신이 속하는 공간을 상실하는 것이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서 사회 안에 들어가게 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저자는 이를 증명해내기 위해서 자리를 얻지 못하는 이들이 인간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아렌트가 이야기하듯이 장소의 박탈과 법적 인격의 박탈은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자리를 얻지 못하는 여러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성에 대한 그녀의 분석이다. 

부록에 여성에 대한 글도 있으니 참조할만 하다. 

그녀는 여성이 집안에 속한 존재로서 가부장주의란 남자만이 집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칭한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집구석에 처박혀있지 않고 싸돌아다니는' 여성에 대한 혐오담론이 형성되고 가능해진다. 

김여사, 된장녀, 개똥녀, 맘충 등은 여성이 공동장소를 이용할 자격이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한다. 

과거 여성들은 직업을 얻기 위해 남자들의 관용을 요구했다. 

물리적 의미에서의 사회는 남성에게 속해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표현하는 남성들의 갑질이 성추행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성들에 대한 우위를 표현하고 그들을 환대하지 않음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성적우월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거를 지배했던 명예의식은 일종의 위치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는 이전의 위치 체계가 무너지고 모든 이들이 사람대접을 받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발견은 근대화의 핵심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화도 결국은 새로운 신분질서로의 회귀로 복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이후, 우리 사회도 명백한 신분주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주거환경으로 구분짓고, 자동차로 구분지으며, 로열 패밀리들이 거할 수 있는 영역이 생겨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신분주의가 학교 폭력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진이 더이상 가난하고 공부못하는 아이들이 아니다. 

교실 내의 위계질서는 사회의 위계질서를 닮았다. 

위에 있는 아이들은 별다른 이유없이 아래의 아이들을 괴롭힌다. 

장난삼아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관계를 지배하는 감정은 경멸이다. 

아이들은 경멸하는 법과 경멸에 대처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가게 하는, 즉 사람됨을 잃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대안으로 무조건적 환대에 희망을 걸고 있다. 

데리다 같은 이는 이러한 환대의 실체를 부인했으나, 저자는 이러한 무조건적 환대만이 사람이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근간이 된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근거하여 존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환대는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게 된다. 즉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일이다. 

태어나는 모든 이들에게 인간생명의 자리를 주는 사회는 그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된다. 

이에서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적절한 공간성을 부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시대의 문제는 그림자를 가지지 못한 이들의 문제, 즉 장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 자신들이 속한 곳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또는 그들이 머물러도 좋은 자리, 점유할 수 있는 위치를 이 세계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장소상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마르크스는 장소를 갖는 것과 자유의 연관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은 누구나 거처를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주인의 권리를 누렸다. 

근대화는 무수한 이들이 그들이 있던 곳에서 뿌리뽑아 미지의 곳으로 내던져지게 했다. 

그리고 이에서 인간됨을 잃어가는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공동체가 해야 하는 일은 자리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다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위치감각을 만들어 주는 것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공동체에 해야 하는 구체적인 환대는 공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물리적 공간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들의 삶의 근간이 깃들 수 있는 공간창출이며,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그리게 하는 공간감각이다. 

사람은 장소를 내어주는 환대에 의해서 살아갈 힘을 얻으며, 그것이 굳건하여질 때에 사람됨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란 궁극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동체를 이야기하시는 것은 진정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람됨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대형화되어가는 교회가 진정한 사람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개인적 욕망의 소비처가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편의적 회개와 부끄러움 없는 욕망의 추구가 가능한 공간이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고리는 끊어버리는 구조가 되어간다. 

대형화되어가는 교회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에 편리한 구조임이 분명하다. 


교회가 사회의 위계질서를 받아들이고 사람들로 오히려 자리를 잃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성으로 교회는 유지되어 왔다.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이러한 관성을 극복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교회됨의 문제를 고민하며 교회를 시작했지만 여전한 우리의 관성이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힌다. 


서로를 향한 적극적 환대만이 길이다. 

적극적 환대를 이루기 위해서 비약적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서로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 일상화될  때에야 공동체 감각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상속의 환대가 공기가 될 때까지 이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