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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하기

[책] 동성애와 기독교 신앙



2019년이 되었다. 

아내는 방학이 되어서 집에 있고, 아이들은 서로 놀기 시작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나의 시간들이 생겨나고 있다. 


나의 시간들이 돌아오고 있고 나는 다시 감각을 살려 이전에 했던 활동들을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티스토리에 접속한지가 거의 10개월이 되어서 계정은 휴면상태가 되어 있다. 

휴면상태를 풀고 처음으로 글을 써야 겠다고 생각하는 주제는 바로 동성애에 대한 것이다. 


월터 윙크의 책을 검색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출판사도 독특하다. 

무지개신학연구소. 

성소수자들의 해방적인 성경해석과 신학, 다종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바람을 해명하려고 노력하겠단다. 

대단하다. 

그 대담한 주장이 놀랍다. 

그리고 그 시도만으로도 얼마든지 배제를 당하는 이들과 같은 취급을 당할 수 있음을 알기에 놀랍다. 


동성애에 대한 여러 책이 나온 것은 알지만, 월터 윙크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고 싶어서 이 책을 골랐다. 

그리고 그의 동성애에 대한 성경신학적 정리는 매우 명쾌하면서도 생각할 것들을 던져 주었다.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사실 너무도 많은 것을 건드린다. 

문자주의 해석에 대해서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그리고 성경의 율법을 어떠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기독교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주류의식에 대한 문제 등.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도전적일 수 있다. 

감히 예상컨대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해석으로 큰 도전을 받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현재 20-30대에서 동성애의 문제는 꽤 대중화되어 가고 있고, 그만큼 감정적인 문제가 되어 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발언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그럼에도 이 시대의 문제와 씨름해야 할 목회자는 반드시 먼저 공부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가야 하는 것이 맞다. 

이 글은 나의 그러한 시도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신뢰할만한 저자들은 동성애자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자임을 밝힌다. 

기대받았던 신학생이 동성애자임을 밝힌다. 

준비되지 않았던 이들은 당황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10여년 전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며 상담한 이를 내가 어떻게 대했는지, 내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지 잘 기억하기도 힘들다. 

아마도 무척 당황하며 횡설수설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먼저 실존적으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의 친구가 동성애자라면 당신은 어떻게 그를 대할 것인가. 

이는 동성애자를 대상화하고 악마화하는 문제에 대한 강력한 질문이다. 

몇년 전에 동성애자들을 욕하는 페이스북 게시물에 '그래도 그들도 사랑해야 할 사람이 아니냐'고 묻자, 많은 목사들이 내게 화를 내며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고 했다. 

목사라고 대답하지 않고 친구를 블락시켰다. 

적어도 그들에게 동성애자 친구가 생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우리의 진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우리는 답을 해야 한다.


월터 윙크는 성경에서 동성애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는 본문들은 실상 동성애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소돔에서 시도되었던 집단 강간이나 신명기 23장에서 이야기하는 목록은 성적 폭력이나 가나안 제의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6:9와 디모데전서1:10이 가리키는 것도 동성애에 관한 것인지 난잡한 "고용된 성행위"에 대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더욱 과감하게 주장하기를 바울은 동성애적 지향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성경은 동성애적 지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사실, 성경을 들여다보면 성적윤리가 그렇게까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의 도덕적 개념관 구약의 성적윤리가 일치하지 않는다. 

남녀 사이의 성적 관계들을 정산적인 것, 규범적인 것으로 놓을수록 우리는 더욱 딱딱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이를테면 성경은 매매춘, 다중결혼, 형사취수제도, 노예들과의 성교, 첩 제도, 여자를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 조혼 등을 허용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감각에 맞지 않으며, 이를 놓고 하나하나 논쟁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복잡한 율법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우리의 특정한 문화에 예수의 사랑을 적용하는 것에 힘써야 한다. 

예수가 그러하셨듯이 복잡한 율법으로 가기 보다는 사랑의 본질로 개별적인 것을 파악해야 한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라"

관습을 비판하되, 그것을 비판하는 기준은 예수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고 명확하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의 사랑으로 판단해야 함이 옳다. 


사실 동성애 지향을 가진 이들에 대한 기록은 오래 되었다. 

그들을 인정하는 문화도 있었고, 그들의 존재를 거부하는 문화도 있었다. 

교차문화적인 연구에 의하면 76개 사회 중 64%가 동성애를 허용했다고 한다. 

36%의 사회에서 동성애 행위는 금지되었지만 그럼에도 은밀하게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동성애적 지향이 유전적인 것인지, 선천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동성애적 지향을 가진 이들은 그것이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선택할 수 없는 동성애적 지향을 가진 이들을 치료하여 동성애적 지향을 버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치료적 시도를 비롯한 모든 시도들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이미 내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실존하는 동성애적 지향을 가진 이들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된다. 


물론 이에는 또다른 논쟁이 있을 수 있다. 

20세기 중반에 알프레드 킨제이는 남성의 성에 대한 연구를 했을 때 "동성애 경험들"을 가졌던 남성인구의 40%와 "진정으로 동성애자"인 남성들인 5-10% 사이를 구분했다. 

즉 남성간의 성적인 행동이 있다고 다 동성애가 아니라 약탈적인 폭력의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성애적 지향과 약탈적 성의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동성애적 지향과 성적 일탈이 가져오는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동성애에 도덕이 적용되지 않게 된다.


우리가 동성애적 지향을 인정하되, 그 안에 존재해야 할 사랑의 모습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성경이 실제로 동성애적 지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면 우리는 인간사랑에 대한 관점으로 그들을 보아야 하며,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마음 속에 혼란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도전은 이러한 복잡한 문제 앞에서 진정으로 발휘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조직화된 종교는 사람이 단순하다고 생각하여 율법을 복잡하게 만들지만, 예수는 정 반대로 그들을 하나님께로 데려오기 위해서 율법을 매우 단순화시키셨다. 


우리는 이 어려운 문제 앞에서, 그럼에도 사랑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질문받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난민 문제, 무슬림 문제, 페미니즘 문제 등. 배제하고 차별하는 문화가 힘을 얻어가는 이 시점에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결국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사랑을 적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다.